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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맞닿은 곳에, 따뜻한 나라가 있다. 온화한 기후 아래 풍족한 자원과 인심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이 나라는 일 년 전, 전대 왕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로 이국에서 온 새로운 사람이 왕이 되었다. 왕 잠뜰은 왕성 근처의 바닷가를 홀로 걷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왕을 위한 하루 휴가 날, 그녀는 그 시간을 바닷가에서 산책하 쓰기로 마음먹었다.

    

잠뜰은 바닷가에 높이 솟은 평평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해식절벽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낮아, 만약 여기서 아래 바다로 뛰어들어도 다치지 않을 높이였다. 바위 아래 바다는 큰 범선도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깊었다. 그 짙은 푸름을 잠뜰은 내려다보았다. 파도가 바위를 두드리며 하얀 거품으로 부서져 내렸다.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울리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잔잔히 간질였다.

    

    

    

"왜 표정이 죽상이야?”

    

"-!”

    

 

    

큰 파도 소리와 함께, 언뜻 들어보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를 돌아보니, 일 년 전 보았던 얼굴이 서 있었다. 분명 인기척이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잠뜰은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공룡? 네가 어떻게 여깄어?”

    

"내가 못 올 곳 왔나? 난 바다가 닿은 모든 곳을 갈 수 있어. 파도 타고 돌아다니다가, 누가 한숨 푹푹 내쉬는 소리가 들려서 와봤지.”

    

    

    

그는 태연히 웃으며 다가왔다. 대무역의 중심해에서 강력한 왕국으로 자리 잡은 인어 왕국의 왕자, 공룡이었다. 일 년 전 왕위 후계자를 정하는 최종 시험에서 그녀에게 패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외교 때문에 편지는 종종 주고받았고 사절단을 통해 소식은 계속 들었지만, 얼굴을 직접 보는 건 꼬박 일 년 만이었다.

    

    

    

“나라 하나 통째로 물려받아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얼굴이 왜 반쪽이 됐어?”

    

“무슨 소리야, 나 잘살고 있어. 내 고향이랑 비교도 안 되게 따뜻하고 풍족한 나라라 심각하게 골머리 썩일 일도 없는데, 내가 왜 힘들어?”

    

“흐응”.

    

    

    

공룡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잠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고작 그 정도 거짓말로 속여 넘어가려는 거냐며 놀리는 것 같았다. 시선을 대충 받아넘기다가, 그 시선을 외면하다가, 결국 잠뜰 쪽이 먼저 졌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나라는... 좋은 나라야. 따뜻한 기후에, 사람들이 먹을 것도 많지. 바다도 인접해 있어서 교역하기도 좋잖아. 사계절 내내 눈이 와서 농사는 꿈도 못 꾸었던 내 나라와는 다르더라고. 난 사실 파도치는 바다도 처음 봤어, 내 나라의 바다는 항상 얼어붙어 있었거든. 그런데 이곳은 너무 따뜻해서 여름에는 물론 겨울에도 눈이 안 온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후론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좋지 뭐, 눈 그거 차갑기만 하고 아무 쓸데도 없잖아.”

    

 

    

잠뜰은 짐짓 싫증 났다는 말투를 쓰며 자신의 고향땅을 말했다. 잠뜰의 고향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에 자리한 차가운 겨울나라였다. 일 년 내내 언제나 추운 겨울처럼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사람이 살기엔 물이 얼어붙은 그곳보다 당연히 따뜻한 이 나라가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공룡은 잠뜰의 거친 말투 속에 숨겨진 진심을 알아차렸다.

    

    

    

“고향에서 보는 눈이 그리워?”

    

“....”

    

    

    

잠뜰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왕족으로서의 자존심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낮게 가라앉은 무채색이었다.

    

    

    

“이상하지? 이제 와서 말이야. 나는 그 추운 땅에서, 내 형제들과 평생 권력 다툼하면서 지냈어. 마실 물에 독이 들어갔나 의심해야 했고, 누군가 짠 함정에 당해 창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몇 날 며칠을 갇혀 있기도 했어. 그게 싫어서 필사적으로 다른 나라로 탈출했는데, 이제 와서 고향에서만 볼 수 있는 눈이 그립다니 말이야.”

    

“이상할 게 뭐 있어. 인간들 표현 중엔 향수병이라는 것도 있잖아.”

    

“하하, 향수병이라... 그딴 나라에 느끼는 그리움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잠뜰은 바다 건너를 바라보았다. 저 수평선 너무 어딘가, 그녀가 나고 자란 나라가 있었다. 인간들의 기술력으로는 몇 달을 한참이나 북쪽으로 가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척박하고 춥지만 아름다운 설원을 가진 나라가 있다.

    

    

    

“거기서의 삶은 힘들었어도, 눈이 내리는 풍경만큼은 좋아했거든. 방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해 정적인 내 방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창밖 눈이 만드는 그림자였어.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공주라는 이름을 가진 인형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 차갑게 내 뺨에 내려앉는 눈을 느끼면... 아 나 정말 살아있구나, 그렇게 느끼게 되거든. 그 감각 하나로 그 추운 땅을 버텼어. 세상을 하얗게 만들며 내리는 그 풍경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여기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잠뜰은 문장을 마무리하는 것을 조금 머뭇거렸다. 한참을 단어를 고르고, 다시 지우고, 또 다른 단어를 고르기를 반복하다가, 공룡을 돌아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그래, 맞아. 눈이 보고 싶어. 하하, 내 생각보다 내가 좀 지쳤나 봐.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선...”

    

    

    

바닷바람이 스쳤다. 잠뜰은 흩날리는 저의 머리카락에 시야가 순간 가려졌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런 표정을 다른 이에게 오랫동안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바람이 멎어 들자, 공룡이 물었다.

    

    

    

“네 고향 나라에 갔다 오면 안 돼?”

    

“안 돼, 나는 이 나라에서 외국인이잖아. 고향에 갔다 오면 소문이 어떻게 돌 줄 몰라.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에 팔아먹으려는 이기적인 왕이다, 라면서 말이야.”

    

“몰래 갔다 오는 건?”

    

“한 나라 왕이 몰래 갔다 오는 게 쉬울 리 없잖아. 게다가 몰래 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건 진짜 외교 문제야.”

    

“흐음...그럼, 눈이 오는 다른 나라에 갔다 오는 건?”

    

“지금은 여름인데, 여름에 눈이 올만큼 추운 나라는 내 나라밖에 없거든. 겨울까지 기다려도, 왕이 자유롭게 다른 나라로 가는 게 쉽지 않아서... 공적인 일이 겨울에 생기길 바라는 수밖에 없네.”

    

    

    

왕이라는 단어와 자유는 함께 가기 어려운 단어였다. 그러니 잠뜰은 바라는 것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공룡은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물었다.

    

    

    

“눈... 이란 거 말이야. 어떻게 생겼어?”

    

“아, 하긴 너는 주로 바닷속에서만 지내니까 눈을 봤을 리가 없겠구나. 너희 왕국이 있는 곳도 따뜻한 기후고. 하늘에서 내리는 물방울들을 비라고 하잖아? 그게 날씨가 추우면 하얀 얼음 알갱이로 얼어서 내리거든. 그걸 눈이라고 해.”

    

“그거 혹시 하얗고 작은 덩어리들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는 거야?”

    

“응, 손톱보다도 작은 결정들이 바람이 흐르는 거에 따라 나풀거리며 내려와.”

    

“그거라면, 나 눈이 내리는 곳을 본 것 같아.”

    

“오, 정말? 어디서?”

    

“바다 밑에서.”

    

    

    

잠뜰이 두 눈을 끔뻑였다. 혹시 파도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런데 공룡의 표정을 보니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게 말이 되나?

    

    

    

“뭐라는 거야, 바다에서 눈이 어떻게 와.”

    

“네가 말한 눈이 작은 흰 알갱이들이 나풀거리며 내리는 거면, 그건 눈이 맞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짠데. 직접 보러 갈래?”

    

“뭘 보러 가?”

    

“내가 말한 눈.”

    

    

    

잠뜰은 다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잠뜰은 잠깐만이라며, 미간을 짚으며 잠시 그들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며 이해할 만한 부분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부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눈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거, 바닷속에 있다며.”

    

“음, 좀 깊은 곳에 있어.”

    

“네가 잘 몰라서 그런가 본데, 인간은 물속에서 숨을 1분도 못 쉬어.”

    

“알아.”

    

“알면서 날 거기로 데리고 간다고? 익사시키려고?”

    

“푸핫, 너 날 뭐로 보는 거야?”

    

“인간 친구 놀리거나 익사시키려는 망할 인어.”

    

“너무한데? 그리고 틀렸어. 내가 왕위 계승은 못했어도, 우리나라 왕가 핏줄은 아주 진하게 이어받았거든.”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래서?”

    

“왕족들만 할 수 있는 신기한 일이 있다는 거지.”

    

    

    

공룡은 생글 웃으며 오른손을 자신의 눈 앞쪽으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공룡의 양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씩 흘러나왔다. 흘러 내렸다가 아니라 흘러나왔다고 표현한 이유는,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서 나온 눈물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라 그의 손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공룡은 손을 잠뜰을 향해 움직여,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였다. 그의 손 위에 두 개의 물방울이 둥실 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그것은 더 이상 물방울이 아니었다. 투명했던 물방울이 서서히 굳더니, 크림색의 불투명한 고체가 되어 있었다.

    

    

    

“인어의 눈물이 굳으면 진주가 된다는 말, 인간들의 동화책에서 본 적 있지 않아?”

    

    

    

잠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공중에 떠 있는 진주 두 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내용을 책에서 얼핏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공룡은 두 진주 중 그의 왼쪽 눈에서 나왔던 눈물로 만들어진 쪽을 집어 잠뜰에게 건넸다.

    

    

    

“입 안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어.”

    

“진주를 먹으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나 안 믿어?”

    

“지금 날 바닷속으로 데려가서 익사시키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말을 하는 애를 내가 믿겠냐?”

    

“이러다 오늘 안에 바다에 발도 못 담가보겠네. 내가 먹여줘야 먹을 거야?”

    

“아, 알았어. 내놔!”

    

    

    

잠뜰은 공룡의 손에서 진주를 낚아채, 입 안에 넣었다. 혀 위에 두고 조금 굴리니, 놀랍게도 진주가 조금씩 녹는 느낌이 들었다. 비유할 것을 찾자면, 녹은 진주는 아주 찐득한 커스터드 크림 같았다. 눈물이 굳은 거니 조금 짤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르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잠뜰이 진주를 천천히 녹이는 사이, 공룡은 잠뜰의 등 뒤로 이동했다.

    

    

    

“다 녹여 먹기 전에는 입 열지 말고. 그래야 제대로 스며들거든. 이거 목걸이, 아끼는 거야?”

    

    

    

스며든다는 건 또 뭐야? 하지만 다 먹기 전엔 입을 열지 말라 하였으니 바로 따질 수는 없었다. 아끼는 목걸이냐는 공룡의 질문에 잠뜰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후크로 채워진 목걸이는 긴 줄 가운데에 평범한 보석 하나가 달린 것으로, 그냥 목이 허전해 걸고 온 장식용 목걸이였다.

    

    

    

“그럼 잠깐 실례.”

    

    

    

찰칵, 후크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걸이를 받아 간 공룡은 가운데 보석을 떼며 다시 잠뜰의 앞쪽으로 왔다. 그러고는 공중에 남아있던 진주, 그의 오른눈의 눈물로 만든 진주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찬찬히 살피더니, 그는 진주에 후하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분명 투명했을 텐데, 어쩐지 숨결의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숨이 진주의 표면에 특이한 문양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그 문양은 얼음 결정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고, 파도를 닮은 것 같기도 하였다. 공룡은 그 진주를 목걸이의 보석이 있던 자리에 달린 연결장식에 달았다.

    

    

    

“물에 들어가면 목걸이 절대 빼지 마. 진주를 하나는 마시고 하나는 몸에 지니고 있어야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거든.”

    

    

    

찰칵, 말하며 잠뜰의 뒤로 온 공룡이 다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잠뜰은 조심히 목걸이에 달린 진주를 만져보았다. 매끈한 표면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이 빛을 받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이것이 인어의 눈물과 숨으로 만들어졌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입안에 진주 이제 다 녹았을 거야. 말해도 돼.”

    

“...진짜 바닷속으로 들어간다고?”

    

“어라, 거기서부터 물어보는 거야? 안 보고 싶어?”

    

“아니, 진짜 그런 게 있으면 신기하니까 보고 싶어. 그런데...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을 법한 일은 아니니까, 현실감이 없어.”

    

“그래, 평범한 인간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 그렇지만 넌 날 만났잖아?”

    

    

    

잠뜰이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에, 공룡이 바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빙글 몸을 돌려 잠뜰을 바라보곤, 싱긋 웃더니, 그대로 뒤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잠뜰이 서둘러 바위 끝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동시에 풍덩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얀 물보라 한가운데로 공룡이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잠뜰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뺨과 얼굴에 돋아난 옥빛 비늘, 그는 바다 안에서 절대 다칠 수 없는 인어였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를 이미 만났잖아. 평범한 삶을 살던 인간 잠뜰은 이제 없다고.”

    

“....”

    

“마음 정했으면, 가볼까요 폐하?”

    

    

    

잠뜰은 공룡이 있는 바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 아래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녀는 인생 대부분을 얼어붙은 바다만 봐왔다. 그녀의 나라에서는 바다도, 강도 호수도 얼어붙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파도치는 바다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 본 적도 없다.

    

    

    

“나 수영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래? 조심히 모셔야겠네.”

    

“솔직히 바다가 좀 무서워.”

    

“한 번 들어오면 사랑하게 될 걸?”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튀어나오는 간결한 공룡의 답변에, 잠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명료한 답에 왠지 안도가 되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두려움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무시하기로 했다. 잠뜰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푸른 바닷물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처음엔 두려워서 눈을 뜨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깊이 잠겨 드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숨이 이대로 막혀 버리는 거 아닌가 두려워 입과 코를 꾹 막았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공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그 말에, 잠뜰은 살짝 눈을 떠보았다. 옥빛 비늘이 조금 더 많이 돋아있는 공룡이, 싱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물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지상에서 본 것과 사뭇 달랐다. 햇빛이 물결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얼굴에 물결무늬를 그렸다. 옥빛 비늘은 바닷물에 감싸져 있으니 한층 더 부드러운 빛을 내며 빛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잠뜰은 그제야 자신이 물속에서도 숨이 막히지 않고 편안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이... 쉬어지잖아?”

    

“그럼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잠뜰의 물음에 공룡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씩 지었다.

    

    

    

“긴 버전으로 들을래, 짧은 버전으로 들을래?”

    

“어... 긴 버전?”

    

“육지에 사는 인간들은 물속에서 숨도 못 쉴뿐더러, 얇디얇은 공기 밑에서만 살았으니까 바닷속 물의 압력도 못 견딘다며? 그래서 너의 몸을 일시적으로 이런 수압을 견디고 호흡도 할 수 있을 만한 구조로 바꾼 거야. 지속 시간은 진주 한 쌍당 6시간 정도? 인어 왕족의 눈물로 굳혀 만든 진주를 입 안에서 녹이면 몸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호흡계를 감싸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목에 걸린 진주는 외부 기관으로 작용해서 외부 환경에 네 몸을 맞추기 위한 지표이자 마법을 붙들어두는 역할이지. 내 숨을 불어 넣은 것도 그 마법의 매개첸데, 여기서 인어의 숨 작동 원리는-”

    

“미안, 짧은 버전으로 들을게.”

    

“인어들의 마법이랍니다~ 참 쉽죠?”

    

“너 지금 즐기고 있지.”

    

“하하,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자고.”

    

    

    

공룡은 검지손가락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두어 번 그려보았다. 그러자 잠뜰 주변의 물이 부드럽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수영 못하는 잠뜰을 위해 그녀 주변의 물살의 흐름을 조절해 잠뜰이 잘 이동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다음에 원하면 수영을 가르쳐주겠다며, 공룡이 물의 흐름을 타며 이동했다. 저렇게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인어에게 수영을 배우면 실력이 빨리 늘긴 하겠다고 생각하며 잠뜰은 공룡이 이끌어주는 대로 물살에 몸을 맡겼다.

    

바다 아래의 세상은 잠뜰이 처음 보는 것뿐이었다. 물결에 흔들리는 해초, 떼 지어 지나가는 물고기, 자신의 드레스룸보다도 알록달록한 산호까지. 저 멀리 거대한 고래가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호기심 많은 어린 돌고래가 공룡과 잠뜰을 향해 다가왔다. 공룡은 바닷속 생물들에 익숙한 듯 어린 돌고래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잠뜰에게도 만져보라며 옆으로 비켜주었다. 잠뜰은 떨리는 손으로 돌고래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기 돌고래는 기분 좋은 듯 몸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리더니, 인사하듯 지느러미를 흔들고는 제 무리로 돌아갔다. 잠뜰은 상기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돌고래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가 그런 표정 지을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다행이라며 공룡이 크게 웃었다.

    

공룡과 잠뜰은 계속 바다 아래로 내려갔다. 빛이 점점 줄어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내려갔다. 어두워지니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을 알았는지 공룡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앞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공룡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집중하며 내려가니, 어느새 두렵지 않게 되었다.

    

    

    

“다 왔어, 여기야.”

    

    

    

공룡은 거대한 암초 지대 사이로 들어와, 그중 문처럼 구멍이 나 있는 바위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엔 생각보다 큰 공간이 있었고, 문의 반대쪽에 바다가 훤히 보이는 커다란 구멍이 또 나 있었다. 바위보다는 거대한 창문이 나 있는 작은 방 같았다. 수압을 생각했을 때 이런 빈 구조의 바위가 어떻게 생성되었냐고 물으니, 공룡은 자연과 인어 마법의 작은 합작이라고 대답했다.

    

    

    

“여기 내가 발견해서 다듬은 은신처거든. 다른 인어들은 여기까지 잘 안 와. 저쪽, 창문 쪽 보고 있을래?”

    

“저것도 창문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런데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지금이야 그렇지.”

    

    

    

공룡이 바닷속으로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진주에 숨결을 불어 넣을 때와는 또 다른 숨인지, 이번 숨은 그대로 형태를 유지해 공기 방울이 되었다. 서너 번 반복하자 주먹만 한 공기 방울들이 열 개쯤 생겨 두둥실 공룡의 주위를 떠다녔다. 공룡이 각 공기 방울을 가락으로 가볍게 톡 건드리자, 방울 안에 작은 불빛이 반짝이며 생겼다. 열 개의 공기 방울은 이제 열 개의 작은 램프 같았다. 공룡이 두 손으로 물살을 만들어, 그 방울들을 창밖으로 두둥실 보냈다. 빛을 머금은 방울들은 바다 곳곳으로 조용히 퍼져나가더니, 하나둘 자리를 잡고 멈추었다. 창밖의 어두운 바다 곳곳을 빛의 방울들이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잠뜰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때?”

    

    

    

눈, 그것은 눈이었다. 창밖 짙푸른 바다에서, 작은 흰 알갱이들이 나풀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고요히 내리는 작은 눈 조각들은, 공룡이 올린 공기 방울들의 빛을 새하얀 빛으로 반사해 냈다. 물결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내리는 방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창을 통해 밖의 눈이 내리는 풍경은, 어린 시절 그 작은 방에서 내다본 눈이 내리는 풍경을 똑 닮아있었다. 색채도 온도도 다르지만, 그 아름다움은 똑같았다.

    

    

    

“아름다워... 진짜, 눈이 오잖아...?”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잖아?”

    

“어떻게? 여긴 물속이잖아. 얼음이면 녹을 텐데...?”

    

“뭐, 사실 진짜 눈은 아닐 거야. 우리 왕성 연구자가 저거 얼음은 아니랬거든. 바다 위쪽에 있던 것들이 뭉쳐서 내리는 거라던데?”

    

“그렇구나... 저건 늘 저렇게 내리는 거야?”

    

“응, 1년 내내 볼 수 있어.”

    

“여름에도?”

    

“지금 여름이잖아?”

    

“아, 맞다 그랬지.”

    

    

    

넋 놓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잠뜰은, 마지막 말을 하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워진 눈빛은 과거 어느 한때의 풍경을 겹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 여름에도 눈이 오는 나라는 내 고향뿐인 줄 알았는데, 바닷속에서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구나. 같은 풍경을 알고 있는 이가 또 있었구나.”

    

“....”

    

“내 고향에서 이렇게 멀리 떠나왔으니, 이제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은 나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었네.”

    

    

    

잠뜰은 싱긋 웃으며 공룡을 돌아보았다. 그랬기에 창밖 풍경 대신 잠뜰의 표정을 보고 있던 공룡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저 눈을 너희 나라에선 뭐라고 불러?”

    

“딱히 뭐라 부르진 않는 것 같던데.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렇구나...”

    

“네가 지어줄래?”

    

“내가? 그래도 돼?”

    

“안 될 건 또 뭐야?”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는 잠뜰에게 공룡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뜰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곤 열심히 고민하며 이름 후보들을 생각해 냈다. 공룡은, 그 반짝이는 그 눈이 지상에서 보았던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눈빛보다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바다눈, 그렇게 부르자. 바다에서 내리는 눈이니까.”

    

    

    

마침내 잠뜰이 이름을 골랐다. 공룡은 이름을 듣자, 풉하고 작게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작은 소리도 물속에서는 잘 전달된다고, 잠뜰이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야,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그냥. 참 인간다운 이름이다 싶어서.”

    

“인간다운?”

    

“눈은 육지 생물들의 전유물이잖아. 바닷속에서 사는 우리들과는 하등 관련 없는 거고. 내가 눈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저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리고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고유 이름이 아니라 육지 현상과 닮았다는 뜻으로 바다 뭐시기라고 지으면, 뭔가 좀 그렇잖아?”

    

“아... 이상해? 그럼 다른 거로-”

    

“아니, 난 좋은데? 바다눈이라는 이름은, 너밖에 못 짓는 이름이잖아.”

    

    

    

잠뜰의 입이 답을 하지 못한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놀란 것인지, 작은 불빛 아래 동그랗게 눈을 뜬 잠뜰의 표정이 보였다. 공룡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름에 바다가 들어가는 건, 바다에 평생 사는 우리들이 지은 게 아니라, 물 바깥에서 숨을 쉬는 내 친구가 방문해서 지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좋아.”

    

“...”

    

“아마 앞으로도 난...”

    

    

    

공룡은 말을 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음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잠뜰은 구태여 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바다눈이 내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린 시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창밖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던 그 시절, 그토록 사랑했던 풍경과 똑 닮아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혼자서 눈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둘이서 본다는 점이었다. 공룡은 바다눈을 바라보는 잠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웃으며 그 역시 시선을 깊은 바닷속으로 돌렸다. 하얗게 내리는 바다눈을 바라보며, 그는 아까 삼켜버린 뒷말을 속으로 읊조려보았다.

    

    

    

아마 앞으로도 난, 저 바다눈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나겠지. 그 이름은 육지에서 온 내 친구, 너밖에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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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 앞 해변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태양은 저물어가면서 바다 역시 아름다운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하늘과 바다는 언제나 색이 닮아 있어, 가장 강렬한 색이 되는 순간까지도 서로의 색을 닮았다. 그 아름다운 수면으로 두 사람이 빠르게 올라왔다. 숨을 몰아쉬더니, 둘은 해변으로 올라왔다. 젖은 모래가 두 사람의 발자국을 그렸다.

 

 

“해가 지고 있다니, 6시간이 거의 다 됐었구나. 진짜 시간 아슬아슬했네.”

 

“그러게 진작 올라오자니까, 조금만 더 보자고 네가 계속 조르는 바람에 마지막에 급하게 올라와야 했잖아. 마지막으로 이 속도로 헤엄쳐본 지 진짜 오래됐는데.”

 

“하하, 얼마 만에 본 눈인데. 좀 더 보고 싶었단 말이야.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더라.”

 

“까딱하면 네 말대로 익사할 뻔했는데 좋으시단다. 음? 야, 그렇게 해서 언제 말리게? 이리 와, 옷 말려줄게.”

 

 

 

잠뜰은 자신의 드레스 자락의 물을 짜다가 공룡의 말에 돌아보았다. 어떻게 말려줄 거냐고 묻기도 전에, 공룡이 잠뜰의 머리카락 끝을 오른손으로 살짝 잡았다.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무언가 읊조렸다. 그러자 잠시 후, 잠뜰의 머리카락과 옷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광경에 잠뜰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작은 물방울들은 모여 하나의 큰 물방울이 되더니, 이내 비처럼 촤악 떨어져 바다로 돌아갔다. 공룡은 이제 물기 하나 남지 않고 바짝 마른 잠뜰의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진주를 회수해 가겠다며 목걸이를 달라고 하였다.

 

 

 

“이거... 내가 갖고 있어도 돼?”

 

“지속 시간 끝나서 그거 이제 평범한 진준데. 갖고 있어도 다시 바다에서 숨은 못 쉬어.”

 

“알아. 그냥... 기념품으로 갖고 있고 싶어서.”

 

“그래라, 그럼.”

 

 

 

공룡은 별거 아니라며 선뜻 허락해 줬다. 잠뜰은 기쁜 듯 진주를 손에 꼭 쥐어보았다. 공룡은 이만 가보겠다며 뒤돌아 바다로 향했다. 등을 보이며 한 팔로 흔들어 인사하는데, 잠뜰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뭐냐며 공룡이 잠뜰을 돌아보니, 잠뜰이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또... 볼 수 있을까?”

 

“바다눈? 글쎄, 내가 이 나라에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렇, 구나....”

 

“...가끔 들를게.”

 

“정말?!”

 

“어이쿠, 목소리 변하는 거 봐라. 눈이 그렇게 좋아?”

 

“응, 무척.”

 

“네가 그러니까 나도 네가 말한 눈이 한 번 보고 싶네.”

 

“한 번 보면 사랑하게 될걸?”

 

“이상하다, 그거 내가 한 대사였던 것 같은데?”

 

 

 

공룡과 잠뜰은 마주 보며 쿡쿡 웃었다. 이젠 정말 돌아갈 시간이다. 공룡은 한 팔을 앞으로 가져오며 허리를 숙이는 인간들의 궁중 예법에 맞춘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만 들어 눈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모시러 오지요, 폐하.”

 

 

 

다홍빛으로 물든 수면이 한 차례 흔들렸다. 인어가 돌아간 자리엔 둥근 파문만이 남아있었다. 바닷가에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집을 찾아가는 바닷새의 울음소리만이 한 차례 울렸다.

 

바닷속으로 깊이 잠수하며, 공룡은 눈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뜰이 그토록 자랑하는 풍경이 궁금하였다. 어떤 풍경이기에 그와 비슷한 광경을 보기만 해도 그렇게 눈을 반짝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에 잠뜰을 바다눈이 보이는 곳으로 데려올 때 최대한 잠뜰이 봤을 것과 비슷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진짜 눈을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뜰의 고향 왕국은 가는 길이 조금 멀지만, 인어인 자신이 못 갈 곳은 아니었다. 돌아가면 여행 짐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공룡은 조금 더 빨리 헤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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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공룡은 다시 그 해변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육지를 밟는 것과 동시에 그의 옥빛 비늘을 감췄다. 공룡은 북쪽 나라에서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잠뜰이 자랑했던 눈이 오는 풍경을 충분히 보고 왔기에, 잠뜰과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바다눈을 보는 장소는 다음에 꾸미기로 했다. 지금은 잠뜰에게 자신이 눈을 보고 느낀 것을 말하고 싶었다.

지난번엔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지금은 직접 왕성으로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 해변에서 사박거리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공룡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공룡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네.”

 

“...잠뜰?”

 

 

 

목소리는 그가 기억하던 잠뜰이 맞았다. 하지만, 얼굴이 그가 마지막에 봤던 것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잠뜰의 얼굴과, 반가운 듯 자신을 향해 흔드는 그녀의 손에는,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공룡은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너, 너 왜 이래? 아팠어? 왜 주름이 이렇게....”

 

“뭐래, 건강해.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변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 이십 년밖에 안 지났는데 왜-”

 

 

 

소리 지르듯 말을 내뱉다가, 그대로 멈췄다. 공룡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가, 잠뜰의 안정된 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잠뜰은 괜찮다는 듯이 부드러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미소에 공룡의 눈동자가 더욱 흔들렸다.

 

 

 

인어와 인간의 시간은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공룡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은 인어인 공룡에겐 얼마 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인간인 잠뜰에겐 육체가 전부 변해버릴 만큼 기나긴 시간이었다. 이십 년의 시간은 숫자로 따지면 똑같겠으나 자신이 기다린 시간과 잠뜰이 기다린 시간은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눈은 잠뜰에게 특별한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 기다림의 차이를 절망적으로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째서 조금 더 빨리 이 사실을 깨닫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내가, 여기 온 건 어떻게 알고 왔어?”

 

“몰랐어. 나 매일 이쪽으로 산책하거든. 파도 소리가 좋아서. 뭐... 네가 왔나 안 왔나 겸사겸사 보면서 말이야.”

 

“계속... 기다린 거야?”

 

 

 

잠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뜰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공룡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십 년 전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였다. 인어의 눈물로 만들고 인어의 숨으로 술식을 새겨넣었던 진주가 달린 목걸이. 효력이 끝났으니 수거해 가겠다는 것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겠다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너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왜 정확히 만날 시간을 정하지 않았을까. 왜 가끔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썼을까. 왜 눈을 그리워했던 잠뜰의 심정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었을까. 왜 우리의 시간의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워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 공룡 대신에, 잠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오랜만에 나 눈 보여줄래?”

 

“어? 어어, 그래. 가자.”

 

 

 

당황한 심정을 애써 숨기며 공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는 술식만 다시 새기면 되겠다며 진주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고,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려 진주로 굳혔다. 잠뜰에게 건네니, 지난번과 달리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진주를 입에 넣었다.

 

바다에 뛰어들 때도 이전과 달랐다. 조금 무서워하며 겨우 뛰어들었던 바닷물에 잠뜰은 웃으며 대범하게 들어갔다.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표정이 밝았다. 잠뜰은 자신이 수영 연습도 했다며 바닷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여 보였다. 그 모습에서, 얼마나 바다로 다시 갈 날을 기대하며 노력했는지 보여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잠뜰에게 이런 기분을 말하고 싶지 않아, 인어 앞에서 수영 자랑하는 거냐고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다시 물결을 만들어주었다.

 

공룡과 잠뜰은 그렇게 피부를 스치는 바닷물의 감각에 몸을 맡기었다. 깊은 곳, 빛이 희미해져 갈 즈음에 그들에게 익숙한 장소가 보인다. 이십 년이 찰나 같은 공룡에게는 아주 생생히 기억나는 곳, 그리고 그곳을 인간의 수명으로 이십 년이나 기다려온 잠뜰에게는 꿈에서 여러 번 봤기에 생생히 기억나는 곳이었다.

 

 

 

“여전히 아름답네.”

 

 

 

공룡이 공기 방울 등불을 또다시 여러 개 만들어 바닷속으로 띄우자, 하얗게 날리는 바다눈을 본 잠뜰은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주름이 진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공룡은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 네 나라에 가서 눈을 보고 왔어.”

 

“그래? 어땠어?”

 

 

 

공룡은 잠뜰의 옆으로 부드럽게 헤엄쳐 다가와 섰다. 그의 움직임으로 일은 약한 물결이 잠뜰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흔들었다.

 

 

 

“생각보다 엄청 닮진 않았던데. 그래도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건 비슷하더라. 네가 왜 바다눈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알겠어.”

 

“그리고?”

 

“그리고라니?”

 

“직접 본 눈은 어땠어? 네 감상이 궁금하네. 조금 더 말해 봐.”

 

 

 

잠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눈을 향해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던 걸까. 공룡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북쪽의 풍경과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봤다.

 

 

 

“피부에 눈이 닿을 때, 차가워지는 감각이 이상했어. 나는 바닷속에서만 지냈으니까, 언제나 사방에서 느껴지는 물의 감각이 익숙하잖아. 그렇게 한 점만 톡 닿는 느낌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어. 피부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더라. 처음 느껴보는 온도였어. 바닷속도 차갑지만, 물이 얼어붙는 온도는 아니잖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온도였어. 그렇지만 싫지는 않더라.”

 

“내리는 눈 아래 있으면 그렇지. 머리카락에 쌓이지는 않았어?”

 

“머리카락? 완전 하얗게 변해버렸어. 나는 내가 너무 추운 곳에 있어서 내 몸에 문제 생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의사 찾아가려고 했- 야, 웃지 마! 내가 그게 눈 쌓인 건지 어떻게 알았겠어? 무게도 안 느껴졌는데! 바다에 들어가니까 다 녹아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그제야 그게 눈인 줄 알았어. 야, 웃지 말라고 했다?”

 

“하하, 미안 미안. 그리고 또?”

 

“눈끼리 꾹 누르면 뭉쳐지더라? 작은 아이들이 나와서 그렇게 눈을 뭉쳐서 뭔가 열심히 만들더라고. 눈...사람?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라. 그게 신기했어. 저기 내리는 바다눈은 보통 누가 가서 뭉치거나 하지 않거든, 아마 잘 뭉쳐지지도 않을 거고. 그런데 눈은 그러니까 신기하더라. 나도 애들 따라서 눈 두 덩이 뭉쳐서 위에 쌓아둬 봤어.”

 

“나도 창가에 쌓인 눈 모아서 작은 눈사람 만들고 그랬는데. 그리고?”

 

 

 

잠뜰은 공룡의 말이 즐겁다는 듯 쿡쿡 웃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눈은 여전히 창밖 바다를 향한 채였다. 공룡은 잠시 머뭇거리다, 깊이 아껴두었던 기억 한 조각을 꺼내왔다.

 

 

 

“바다가... 얼어붙은 것도, 처음 봤어. 내 바다는 늘 역동적이었는데, 그렇게 정적인 바다는 처음이었어. 언다는 건 개념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눈에 가득 차게 넓은 지평선 끝자락까지 전부 얼어붙은 바다인 풍경이 실제로 가능할 줄 몰랐지. 그 위로 눈이 내리는데, 바다 위가 하얗게 변하더라고. 정적인 풍경 위로 하얗게 눈이 휘날리는데, 그 모습을 몇 시간이고 계속 바라보았어. 네가 옛날에, 네 나라 바다는 늘 얼어붙어 있다고 말했었을 때, 사실 그 모습이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직접 보니까...”

 

“보니까?”

 

“아름답더라. 무척.”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았기에 바다에 모르는 모습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나라에 가서 새로운 바다를 처음 보았다. 바다는 늘 손을 담글 수 있는 것이 당연했었는데,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은 조금의 틈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의 바다와, 그 위로 내리는 눈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잠뜰의 시선이 공룡 쪽으로 움직이더니,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 풍경을 사랑하게 되었어?”

 

“조금은 네가 이해될 정도로.”

 

“내가 그날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그런 기분이었어.”

 

 

 

이십여 년 전 바다로 처음 뛰어들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잠뜰이 입을 열었다. 난생처음 따뜻한 바닷속으로 푹 안겨버리던 그날의 기억은 잊기 쉽지 않았다.

 

 

 

“바다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네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물이 날 감싸 안는 감각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지.”

 

“그러게, 나도 눈에 뒤덮이는 그 포근한 감각을 잊기 쉽지 않을 것 같네.”

 

 

 

얼어붙은 바다만 봤던 잠뜰과,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한 공룡. 서로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났고, 그랬기에 그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이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사람의 인생은 인어와 다르다. 그렇기에 인간과의 만남은 인어에게는 너무나도 짧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순간에도 강렬히 피어나는 인간의 생은 하늘에 내리는 눈발과도 같다. 피부에 닿는 순간 녹아 사라져 버리지만, 눈이 내렸던 자리의 감각만큼은 강렬해서 절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내려앉은 짧은 촉감을 가슴 가득 느끼고 그곳을 바라보면, 이미 눈은 녹아 사라진 후다. 깨달은 순간엔 이미 늦어서, 차가운 감각과 녹아내린 흔적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결국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못해, 눈이 내려앉았던 자리를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순간이 짧다 한들, 교차한 감정이 작은 것은 아니기에.

 

 

 

 

"인간의 수명은 몇 살까지야?"

 

“갑자기? 게다가 너무 직접적으로 묻는 거 아냐?”

 

“몰랐다가 또 놓치기는 싫으니까.”

 

“대충 60살 정도려나? 여기는 먹을 게 많으니까 조금 더 오래 살지도 모르고.”

 

“네 나이 생각하면... 이십 년도 안 남았잖아.”

 

“이십 년이나 남은거지.”

 

“...너무 짧아. 좀 오래 살아봐.”

 

“하하, 그게 마음대로 되나?”

 

 

 

잠뜰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룡은 자신의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자신이 한 말은 웃으라 한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니 억지를 부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역시 오랜만에 눈을 보니 좋다.”

 

 

 

그의 인간 친구는 그저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공룡은 오랜만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은 어두운 바닷속으로 숨겨버렸다. 북쪽 나라에서 보고 온 눈과 비슷하게 내리는 바다눈을 다시 시야에 담았다. 이십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시간을 한껏 받아들여 변해버린 잠뜰의 육신과, 그 시간의 흐름을 뒤늦게야 체감한 공룡의 혼란스러운 심경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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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어는 그 이후로도 계속 만났다. 몇 달에 한 번씩, 몇 주에 한 번씩, 어느 때는 며칠에 한 번씩. 옥빛 비늘을 가진 인어는 꾸준히 갈색 머리카락의 인간을 찾아왔고, 그녀가 바라는 대로 바다눈을 함께 보았다. 사시사철 내리는 바다눈 덕분에 그들은 사시사철 만날 수 있었다. 만남의 횟수가 쌓여가면서 시간 역시 착실히 흘러갔다. 인어와 인간은 일 년이 흐르고, 삼 년이 흐르고, 십 년이 흘러도 친구로 지냈다.

 

이십 년이 흘러도, 인어와 인간은 친구로 지냈다.

 

이십 년, 인어에게는 얼마 전이라고 표현할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잠뜰 역시 차곡차곡 나이를 쌓아갔다. 주름은 나날이 늘어갔고, 머리카락은 눈을 맞은 듯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그날이 되었다.

 

 

 

그날, 공룡은 미리 해변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여름이었다. 잠뜰에게 처음으로 바다눈을 보여주었던 날도 여름이었다. 하필이면 그 추억이 담긴 계절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치 눈을 내릴 것처럼 생긴 구름이었지만, 이 계절 이 나라에는 눈이 올 수 없다. 구름 덕분에 덥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아니, 핑계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고 습도도 없고 덥지도 않은 이례적인 날씨였어도 기분이 계속 가라앉아 있었을 것이다.

 

 

 

“공룡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공룡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한 남성이 백발의 노인을 안고 있었다. 얼굴과 손에 주름이 잔뜩 졌고, 힘이 없어 걷지 못한지 한참 된 듯 다리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 아니, 그냥 노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뜰이었다. 인어와 수십 년간 친구였던 인간 잠뜰이, 혼자 힘으로는 걷기 힘들 정도로 약한 노인이 되어 그녀의 양아들의 품에 안겨 온 것이었다.

 

그는 잠뜰이 수년 전 왕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입양한 자였다. 잠뜰은 어릴 적 가족이란 존재에게 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현재 새로운 국왕은 잠뜰이 후계자로 골라 선위해 준 눈앞의 이였다. 잠뜰은 후계자일 뿐이라 하였고 그랬기에 양아들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지만, 공룡은 둘 사이가 보기보다 따뜻하게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참을 울고 온 듯 벌겋게 부어있는 그의 눈이 설명이 되지 않지 않는가.

 

 

 

“오셨습니까, 폐하.”

 

“부디... 부디 어릴 때처럼 편하게 불러주세요, 공룡님. 오늘은 제가... 왕의 호칭까지 견디기는, 많이 힘듭니다.”

 

“...잠뜰이는 자는 거야?”

 

“조금 전 궁의가 처방해 준 진통제를 드셨는데, 그래서 졸리신가봐요.”

 

 

 

이십 년이 지나도 인어와 인간은 친구로 지냈다. 그 시간 동안 인간은 나이가 들었고, 결국 더 이상 인간의 의학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일이었다. 그 강렬한 삶의 끝은 인어의 마법으로도 미룰 수 없었다. 인어들은 긴 삶을 부여받았기에 오래 살 뿐, 의학적 지식이 뛰어나 삶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명을 늘리는 그러한 간단한 마법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제는 치료를 받아도 더 나아지지는 못하고 마지막 순간을 하루 이틀 늦추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도 인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에 오자, 잠뜰은 자신의 마지막을 잔잔히 웃으며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억지로 숨을 늘리지 않고 정해진 끝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겠다고 말이다. 마지막 장소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해달라는 잠뜰의 말에, 양아들은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아직도 모르겠어요. 치료가 더 이상 소용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싶어요. 이 이상 붙잡고 있는 것은 의미 없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지만, 선왕께서 저보다도 더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잠뜰을 안은 그의 손이 떨렸다. 그의 눈은 이미 한참을 울고 왔는지 벌겋게 부어있었다. 양어머니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는 사실은, 나라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국왕은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왕 폐하의 친우 앞에서, 추태를...”

 

“아냐, 괜찮아. 사실은 나도 그렇거든.”

 

 

 

국왕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아닌 미지의 생물인 인어, 그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마법보다도 신비하고 기적보다도 희귀한 일이었다. 그런 존재조차도 기적을 바란다는 것이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눈앞의 인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차마 미소로 다 지우지 못한 짙은 슬픔이 언뜻 비쳤다. 긴 삶을 살아왔기에 그 노련한 경험으로 감정을 부드럽게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 인생은 잠뜰이 거니까. 우린 곁에서 그 결정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어.”

 

 

 

치료를 더 안 받겠다고 한 잠뜰의 결정에, 공룡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치료를 받으라 하고 싶었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럽기만 한 희망 고문이 될 거란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뜰에게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빛보다 반짝이는 눈빛이 훨씬 어울리니까.

 

그러니 잠뜰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고 싶었다. 국왕은 입술을 꾹 다물며 감정을 겨우 눌렀다.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는 품에 안은 잠뜰을 공룡에게 조심히 건네주었다.

 

 

 

“선왕 폐하의... 어머니의 마지막을, 잘 부탁드립니다.”

 

 

 

공룡은 조심히 그에게 잠뜰을 받아 안았다. 국왕은 자신의 양어머니의 손을 한 번 더 꼭 잡더니, 눈물을 애써 참으며 돌아갔다. 홀로 돌아가는 국왕의 발걸음은 분명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도 올 때보다도 무거워 보였다.

 

공룡은 가만히 서서 바닷바람을 잠시 맞았다. 해변을 향해 몰려왔다가 빠져나가는 파도 소리가 규칙적인 시간 간격을 두고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바다의 소리가 가득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잠시간 그렇게 있자 하니, 품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잠뜰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깼어?”

 

“응, 바닷소리가 들려서.”

 

“아들 조금 전에 돌아갔어. 안 울려고 엄청 노력하더라.”

 

“이미 내 앞에서 많이 울었어. 다정한 아이라니까, 정말.”

 

“너는 안 울었어?”

 

“응, 나는 웃으면서 인사하고 싶었으니까.”

 

 

 

잠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꾸며낸 감정이나 숨겨진 것은 없었다.

 

 

 

“마지막 인사할 때... 궁인들도 다 같이 와서 울면서 인사해 주더라. 나랑 같이 일하면서 즐거웠다고, 내가 신경 써준 덕분에 좋은 일이 많았다고... 그동안 정말 많이 고마웠다고.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누가 봐도 엄청 고심해서 준비했을 말들을 들으니까... 내가 참 좋은 인생을 살았구나, 싶더라.”

 

“....”

 

“어렸을 때 왕성은, 정치 싸움만 일어나는 차가운 곳이라 생각했는데... 이곳 사람들 덕분에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좋은 삶이었어.”

 

 

 

공룡은 가만히 잠뜰의 말을 들어주었다. 잠뜰은 해변 저 끝에 서 있는 왕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사십여 년의 시간이 녹아있는 곳이었다. 젊은 시절,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 추운 나라에서, 책에서나 들어봤을 기이한 존재들과 시험을 치러 얻어낸 왕좌. 낯선 땅이 처음엔 힘들고 버거웠지만, 이제는 그곳은 낯선 땅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였다. 사십여 년 동안의 좋은 사람들과의 다정한 추억들로 가득 찬 장소였다.

그랬기에, 이제 따뜻한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가자.”

 

“마지막 공긴데, 더 안 느껴도 돼?”

 

“응, 괜찮아.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고 왔으니까.”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공룡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왼쪽 눈에서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눈물은 언제나와 같이 크림색 진주로 굳었다. 천천히, 진주가 두둥실 움직여 잠뜰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잠뜰이 진주를 천천히 녹여 먹을 때, 공룡은 그녀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에 술식을 새겨 넣기 위해 숨결을 불어 넣었다.

 

 

 

둘 모두 이것이 마지막 마법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잠뜰이 다 녹여 먹었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준비가 끝나자 공룡은 잠뜰을 안고 조심히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흔들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자, 부드럽고 거대한 물의 감각에 둘 모두 감싸졌다. 물속에서 자기 몸의 감각을 조금씩 느끼던 잠뜰은, 잠시 내려달라고 하였다. 공룡이 조심히 잠뜰을 놓아주니, 잠뜰이 물속에서 팔을 조금씩 움직이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밝게 웃으며 공룡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바닷속에서는 나 혼자 서 있을 수 있어! 이러니까 젊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옛날이랑 똑같네.”

 

 

 

마음이 욱신거렸지만 공룡은 애써 웃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친구 주위로 물살을 만들어주었다. 이번엔 평소보다도 아주 부드러운 물살을 만들어냈다.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둘은 천천히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시간을 보냈던 은신처로 향했다.

 

은신처에 도착하자 잠뜰은 창 앞에 놓인 부드러운 소파에 앉았다. 이십여년 간 공룡은 이 은신처를 잠뜰이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정성껏 꾸몄다. 방수 처리가 된 책부터, 인어들의 기술력으로 만든 음악이 나오는 소라고둥까지. 곳곳에 공룡이 만들어둔 공기 방울 불빛이 방 안을 은은히 밝혔다. 간단한 먹을 것과, 물 위의 후계자가 보내준 잠뜰의 약들도 잔뜩 있었다. 물에서도 썩지 않는 푹신한 소파도 개발해서 놓아주었는데, 둘은 늘 그 소파에 앉아 바다눈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바다눈은 여전히 아름답네.”

 

“진짜로 마지막 장소를 여기로 해도 돼? 진짜 눈이 내리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데.”

 

“아니, 여기가 좋아.”

 

“왜?”

 

“네가 바다눈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거랑 똑같아. 여긴 내 친구가 준비해 준 곳이잖아.”

 

 

 

공룡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바다눈을 바라보고 있는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의 눈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눈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고향 땅에서 처음 봤던 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내가 거기서 눈을 좋아했던 건,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이 눈밖에 없어서였기 때문이야. 가족도, 친구도 모두 믿을 수 없는 곳이었지. 그 사람들의 태도가 눈보다도 차가웠으니까. 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하늘에서 아름답게 내리는 눈뿐이었으니까. 아름답지만 차갑고, 외로운 기억뿐이었지. 그런데, 여기는 아니잖아.”

 

“...”

 

“여기는 바닷속에서 만난 조금 특별한 내 친구가 날 위해 직접 가꿔놓은 곳이잖아.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 안아주고, 네가 만든 방울 등불들이 은은히 빛을 밝히고. 게다가... 내가 옛날에 말했지? 눈이 닿는 순간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고. 여기 바닷속에서는 사방에서 물이 내 몸에 닿으며 말해주고 있잖아.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이 아름다운 감각을 마음껏 느끼며 살아있다고. 한순간 녹아 없어질 것이 아니라, 머물러 흐를 테니까. 여기가 더 좋아.”

 

 

 

살아있는 순간은 온전히 만끽하며 살아왔다. 그거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인생이다. 잠뜰은 행복했다는 듯 밝게 웃었다. 주름이 잔뜩 진 얼굴이지만 사람의 웃는 얼굴은 어느 순간에서나 가장 잘 어울렸다.

 

잠뜰의 말 사이로 길게 말하는 것이 힘들다는 듯 새액새액 숨소리가 났다. 끝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십 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네.”

 

“이십 년보다 조금 더 지났지. 나 장수했어.”

 

“이럴 거면 그때, 너희 나라로 눈 보러 가지 말 걸 그랬어. 그냥 보내버린 그 이십 년이 너무 아까워.”

 

“그렇지만 네가 그곳에 간 덕분에, 네가 눈을 좋아하게 됐잖아. 내가 그때 얼마나 기뻤는데.”

 

 

 

말문이 막힌 공룡을 잠뜰이 돌아보았다. 바닷속은 지상만큼 빛이 밝지 않아 그녀 얼굴의 주름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바닷속 희미한 불빛 아래 그녀의 모습은, 사십여 년 전 그때와 똑같아 보였다. 그 미소는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똑같았다.

 

 

 

“내 마지막 장소를 이곳으로 허락해 줘서 고마워.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마지막까지 있고 싶었거든.”

 

 

 

네가 나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을 안다.

 

인간과 인어의 수명은 다르고, 그렇기에 네가 나보다 먼저 떠나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언젠가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온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고, 널 잘 보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준비도 해왔다.

 

 

 

“공룡?”

 

 

 

하지만 안다고 한들, 그것이 슬프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방울방울, 진주가 공룡의 눈가에서 떨어져나왔다. 인어의 눈물은 하필이면 흐르는 순간 굳어버려 바닷물 속으로 녹아들지도 못해 숨기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몇 개뿐이었던 진주가 어느새 십수개가 되어 도롱도롱 떠내려갔다. 옅은 불빛을 반사해 내는 하얗고 둥근 것들의 움직임이, 어찌 보면 작은 눈이 내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지금 우는 거야?”

 

“시끄러워, 멍청아. 너 장수한다며. 그럼 여기 오래오래 있을 거잖아. 너 숨 쉬게 하려면 진주 많이 필요할,거니까... 미리 만들어 두는 거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런 억지를 부려보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서툰 거짓말이었다. 그런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지만 잠뜰은 그저 부드러이 웃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바다눈이 하얗고 고요하게 내리고 있었다. 지상의 어떤 나라처럼, 더운 여름에도 계속해서 하얗게 눈이 내렸다. 물살에 흔들리며 나풀거리는 춤을 추며 내려오는 눈의 모습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얀 눈은 고요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천천히 내렸다. 그 눈은 앞으로도, 누군가 떠난 후로도 계속 내릴 것이다.

 

언젠가는 그 눈을 공룡이 홀로 바라보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이름을 지어준 육지에서 온 친구를 그리며 홀로 추억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올 때 너무 힘들지 않도록, 그들은 그들의 추억이 가장 가득한 곳에서 이별하기로 하였다. 단지 지금은,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바다눈은 여전히 천천히, 짙푸른 바닷속을 하얗게 그리며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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