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삑- 삑- 온통 새하얀 공간을 반복적인 기계음만이 가득 채운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새하얗다, 하얗지 않은 것은 자신과 눈앞에 죽은 듯 누워 있는 타인 하나 뿐이었다. 잠뜰이 피곤에 찌든 눈을 몇 번인가 끔뻑인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다, 작게 한숨 한 번 내쉬곤 눈가나 몇 번 짓누른 잠뜰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계속 앉아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회백색 눈동자가 데룩, 굴러간다. 시선이 향한 곳은 새하얀 침대에 혼자 이질적으로 누워 있는 강아지귀의 소유자, 덕개였다.
잠뜰이 또 한 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날 일에는 분명 잠뜰의 책임이 일정 이상 있었다. 그건 단순히 팀장으로서 가지는 죄책감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떨어졌던, 정확히 말하면 제가 잘못 날린 공격에 맞아 그대로 공허 속으로 떨어져 버린 덕개에게 죄악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수도 없이 겪는 단순한 사고였으나, 그렇다고 제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덕개는 완전한 신입이었다. 안 그래도 인력 부족인 부서에 오직 정의감만으로 뛰어든, 기특한 녀석. 그것이 잠뜰이 고생했다며 몇 년 만에 겨우 받은 황금 같은 휴가 시간을 밤잠까지 줄여가며 이 새하얀 공간에 눌러붙어 있는 까닭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더미 데이터 사이로 떨어졌던 덕개를 무사히 구출해서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그날 임무에서 복귀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으나 덕개는 도저히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무의 세계에 빠져서 목숨줄 온전히 붙은 채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 꼴이다. 원래도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별 할 수 없던 녀석이지만 지금은 정말로 눈을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차오른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삑- 삑- 여전히 귓속 때려 박는 기계음의 소리가 선명했다.
거칠게 제 머리칼 헤집은 잠뜰이 신경질적으로 문의 개폐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새하얗기만 했던 벽이 투명한 유리문으로 바뀌더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양옆으로 미끄러졌다. 새하얀 방을 나서면 보이는 것은 또 새하얀 복도다. 지긋지긋하군, 가만히 있다간 정신병 걸리기 딱 좋겠어. 두 눈 질끈 감은 잠뜰이 빠른 속도로 발을 옮기려 할 때였다.
" 오늘도 종일 거기 있었나 봐? "
성실하긴, 불쑥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뜰의 고개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정공룡, 반사적으로 잠뜰이 상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반갑지 않은 얼굴에 자동으로 표정이 구겨졌다. 언제 온 것인지 그곳에는 현재 같은 팀 소속이자 덕개를 더미 데이터 사이에서 꺼내 온 장본인, 공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잠뜰이 경계하듯 매서운 눈초리 쏘아붙이자 공룡이 작게 웃기나 했다. 아니, 웃었던가 매번 쓰고 다니는 웬 이상한 공룡 탈 탓에 공룡의 표정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다분하다는 것만큼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게, 나처럼 겉날개를 챙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공룡의 시선이 덕개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한다, 잠뜰이 자연스레 그 시선을 쫓으면 여전히 미동도 없이 가만 누워 있는 덕개만이 시야에 걸린다. 잠뜰의 미간이 조금인가 좁아진다. 그 꼴 가만 응시하던 공룡이 가볍게 어깨나 으쓱였다. 흐음,
" 답지 않게 겁이라도 먹었어? "
여전히 잠뜰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공룡의 시선이 한 번 데룩 굴러간다. 이거, 생각보다 상태가 더 별론데?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공룡은 그 순간 분명하게 봤었다. 덕개가 떨어지던 그 순간, 잠뜰이 짓고 있던 표정.
지독하게 익숙하고, 공룡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감각. 잠깐 고민하듯 제 턱-정확히 말하자면 공룡탈의 턱- 두들기던 공룡이 곧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불길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지었다. 팀장님. 누가 네 팀장이야? 예상대로, 공룡이 팀장이라는 호칭을 입에 올리자마자 곧바로 날카로운 잠뜰의 반응이 돌아왔다. 예상대로의 반응, 그에 공룡이 작게 웃음소리나
흘린다. 잠뜰은 예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팀장이라는 호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하여튼, 쓸데없이 미련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예의상 고민하는 척 고개라도 한 번 까딱여준 공룡이 잔뜩 장난스런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럼, 선배님?
여전히 공룡 노려보던 잠뜰이 후우, 길게 한숨이나 내뱉었다. 그에 맞춰 갈색빛 앞머리가 작게 나부낀다. 네 선배도
아니야. 왜? 선배가 아니면 후배 취급이라도 해줄까? 잠뜰아~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공룡의 이죽거림에 잠뜰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어쩐지 얼굴에 빠직- 마크가 떠오른 것도 같았다. ...잠뜰 연구원이라고 불러.
어이쿠, 이건 좀 위험한데? 금방이라도 터지기 직전인 잠뜰의 인내심 발견한 공룡이 한 번 더 눈이나 데룩 굴렸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할까, 그럼 잠뜰 연구원님- 잠깐의 정적.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누구 하나 다치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텐데? 순식간에 웃음기 사라진 공룡의 낮은 목소리가 잠뜰에게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독 끈질기군, 잠뜰이 작게 체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공룡의 저런 태도는 반드시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와도 같았다. 저 상태의 공룡을 당해낼 수 있는 방법은 잠뜰로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기 싸움으로 힘을 빼기보단 순순히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 편이 나았다.
" ...이번엔 나한테 일정 이상 책임이 있으니까, "
그뿐이야. 공룡이 진심을 파악하기라도 하듯 게슴츠레 눈 뜨곤 잠뜰을 응시한다. 시선이 묘하게 엇나간다,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땅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집요한 시선이 여전히 그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속이 전부 꿰뚫리는 것만 같다. 삑- 삑- 시끄러운 기계음 소리가 머릿속을 완전히 헤집는다. 어지럽다, 듣고 싶지 않았다. 잠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서버 조사원이 되기 위한 조건 중 가장 기본이자 첫 번째 원칙,
" 감정에 휩쓸리지 말 것. "
이에 부합하지 않은 연구원은 그 자리에서 즉시 강등 처리 된다. 혹은, 이곳에서 완전히 추방 되거나. 너도 알고 있는 내용이지? 공룡의 말과 동시에 공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변한다. 잠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얼굴에는 불안과 혼란을 동반한 표정이 알아보기 쉽게 드러나 있었다. 평소 포커페이스에 능숙하던 잠뜰이, 현재는 표정 관리 하나 되지 않아 온전한 감정이 얼굴 그대로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잠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와중에도 날카로운 시선만은 또렷하게 공룡을 응시한다. 금방이라도 탈이 뚫릴 듯, 매서운 시선이었다. 무슨 소리긴.
" 지금 네 손목에서 나고 있는 소리 말이야. "
삑- 삑- 여전히 소름 끼치게 반복적인 기계음의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모른 척은 안 하는 게 나을 걸? 이제 슬슬 위험 수치잖아, 벌써 며칠째 그러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경계 가득한 눈빛 보내는 잠뜰에도 아랑곳 않은 공룡이 느릿하게 고개나 까딱였다. 흐음... 고민하듯 짧은 비음. 어림잡아서, 대충 17시간 쯤 남았나? 17시간. 잠뜰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잠뜰과 공룡의 오른손에 나란히 착용 된 시계.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시계는 아니었다. 수많은 위험의 당도하는 연구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보고하는 역할- 이라고 포장은 했지만. 실제론, 혹시라도 연구원들이 딴 생각을 하진 않는지 살피기 위한 감시 목적의 장치일 뿐이었다. 일종의 구속구와 마찬가지였다. 고개 한 번 까딱인 공룡이 느긋하게 잠뜰과 시선을 맞춰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상대의 속 파악하려 툭- 던진 가시돋힌 질문에도 공룡은 여상한 목소리로 어깨나 으쓱인다. 말은 무슨, 약 3초간의 정적.
" 도와줄까? "
뭐? 전혀 예상치 못한 공룡의 말에 잠뜰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순식간에 경계 가득 어렸던 표정이 풀리고 얼굴에는 황당함만이 남아있다. 말 그대로야. 나라면 도와줄 수 있거든. 다시 목소리에 장난기 잔뜩 섞인 공룡이 한 걸음, 잠뜰 쪽으로 다가선다. 그에 따라 잠뜰이 뒤로 한 걸음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네가 무슨 수로? 금세 다시 경계 띄운 잠뜰의 미간이 선명하게 구겨진다. 공룡의 탈 너머로 희미하게 눈꼬리가 접히는 모습이 보인다. 웃어? 잠뜰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진다. 안 그래도 사나웠던 얼굴이 몇 곱절로 사납게 변한다. 그거야,
" 바로 이렇게-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선 공룡이 잠뜰의 오른쪽 손목에 착용되어 있던 시계에 마찬가지로 제 오른손에 착용되어 있던 시계를 가져다 댄다. 곧이어 왼손으로 허공에 몇 번인가 타이핑 치자 투명한 스크린이 띄워진다. 모든 행동이 지나치게 자연스럽다, 잠뜰이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도 공룡의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알아볼 수 없는 암호 몇 개인가를 입력하더니 또 허공에서 손을 이곳저곳 휘젓는다. 잠뜰의 시선 또한 공룡의 현란한 손동작을 빠르게 쫓는다. 능숙하다, 얘 양손잡이였던가. 지금 떠올리기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자, 끝~!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끝마쳤다는 듯 가져다 댔던 시계를 떨어트린 공룡이 가볍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확인해 봐,
" 잠잠해 졌을 걸? "
삑- 삑- 전자의 울음소리는 여전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미심쩍은 낯 지우지 못한 잠뜰이 표정 잔뜩 찌푸린 채로 제 오른쪽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확인한 화면에서는 정말로 계속해서 거슬리게 모습을 드러내던 시뻘건 경고 화면이 완벽하게 사라진 채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잠뜰이 공룡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공룡이 어깨나 한 번 으쓱이면 다시 한번 더 시선 돌린 잠뜰이 확인하듯 제 시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정말로, 멀쩡해졌다. 삑- 삑- 하지만, 그렇다면 여전히 귓가에 때려 박히는 이 소리는 대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에 잠뜰의 고개가 번쩍 치켜올려졌다. 야, 너 뭐한 거야. 곧바로 추궁하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룡에게로 향한다. 뭐, 별거 아니야. 그냥...
" 간단한 속임수. "
하지만, 본부라면 이 정도에도 충분히 속아 넘어가겠지. 공룡이 자연스레 제 오른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삑- 삑- 소리는 여전했다. 그제야 그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로 뒤바뀌었는지 알아차린 잠뜰의 표정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너...! 직전까지만 해도 잠뜰의 수치였을 위험 표시가 공룡의 시계 위에 떡하니 떠올라 있었다. 삑- 삑- 너랑 내 데이터베이스를 바꿨어, 간단한 작업이야. 중간에서 슬쩍~ 길만 바꿔주면 되거든. 이걸로, 이제 너는 안전해.
" 대신 내가 위험하겠지만? "
공룡이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 흘리더니 가볍게 어깨나 으쓱였다. 팍- 그와 동시에 잠뜰의 손이 거칠게 공룡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지금 무슨 짓이야! 당장 안 돌려놔? 누구라도 쉽게 주춤할 정도로 험상궂은 잠뜰의 얼굴에도 공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이상한 공룡탈 탓에 동요했는지 아닌지 표정조차 알아볼 수 없었지만, 잠뜰이 그 탈 전부 뚫어버릴 듯 매서운 시선으로 공룡을 응시했다. ...원하는 게 뭐야.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은 목소리를 냈다. 글쎄, 바라는 건 없는데. 너한테도 이득 아니야? 나쁠 거 없잖아.
" 아니, "
너한테 빌붙어서 사는 목숨은 사양이야. 공룡의 능청스런 이죽거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날름 받아먹었을 기회를 스스로 내치다니,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시선이나 몇 번 데룩 굴리던 공룡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나 흘렸다.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뭐, 좋아.
" 나랑 내기 하나 할래? "
마지막에, 네가 웃을지 웃지 않을지. 잠뜰의 차갑게 내려앉은 눈이 공룡에게로 향했다. 무슨 의미야? 공룡의 눈꼬리가 또다시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간단한 승부라고 생각해. 네가 웃으면 내 승리, 그렇지 않으면 네 승리야. 기간은, 이 경고 수치가 본부에 전송되기 전까지. 이렇게 하면 빚이 아니라 정당한 승부잖아? 잠뜰이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두 눈 게슴츠레 뜨곤 공룡을 노려봤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은 뭔데? 공룡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 잠뜰을 마주 응시하기만 했다. 이미 물러날 생각은 없다, 이건가. 공중에서 두 사람분의 시선이 교차한다. 잠뜰이 거친 손길로 잡았단 멱살을 던지듯 놓아버렸다. 공룡은 반항 하나 없이 잠뜰이 던지는 대로 움직이더니, 곧 비틀거리던 몸 가다듬곤 제 옷자락이나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웃음소리.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고-
" 일단 잠부터 자지? "
너, 다크서클 장난 아니야. 공룡의 그 말을 끝으로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잠뜰의 의식이 점점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데이터베이스를 건드는 김에 가볍게 손을 써뒀거든. 얄미운 공룡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려댔다. 시야가 흐릿하다, 잠뜰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암전 앞에서도 안간힘을 다 해 매서운 시선으로 공룡을 노려봤다. 꼭,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럼, 좋은 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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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룡의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박잠뜰은 이렇게 대답 할 것이다. 속 모를 낭만주의자, 혹은 일반의 범주에서 한참은 벗어난 미친놈. 말 그대로 정공룡은 미친놈이었다, 애초에 다 망해 빠진 세계에서 낭만 챙기는 것부터 평범한 사람이 할 짓은 도저히 아니었다. 목숨 왔다 갔다 하는 급박한 임무를 하는 와중에도, 정공룡은 그놈의 낭만 챙기겠답시고 케이크를 만들어 오질 않나, 그걸로도 모자라서 굳이 굳이 색깔별로 초 만들어와선 축하 파티를 하자지 않나... 공룡은 예전부터 줄곧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해대곤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그것이 낭만이라며 시원스레 웃음소리나 흘려대곤 했는데 잠뜰은 그것이 지나치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다 망해 빠진 세계, 과학의 발전에 따른 지구의 멸망은 어찌 보면 정해진 결과였다. 세상이 발전함에 따라 현재는 망가졌고, 그에 맞춰 정부의 높으신 인물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지금 우리가 소속된 그 이름도 거창한 멸망 방어 연구소였다.
연구소에는 크게 3가지 부서가 존재했다. 솔직히, 말만 3가지 부서고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두 가지 부서 뿐이었다. 그마저도 잠뜰이 소속 된 서버 조사부만 뒤지게 구르고 나머지 부서들은 안전한 곳에서 룰루랄라. 특히나, 총괄 관리부서는 번지르르한 이름값 하듯 업적 하나 챙기려고만 드는 멍청이들 집합소였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중요해 보이는 일에는 사사건건 간섭하며 제 이름 올려놓으려 안달이었다. 그냥 돈 많고 권력 가득한 고위급들 앉혀 놓은 흔한 썩어빠진 부패한 부서 하나. 그나마 남은 서버 조사부는 파악한 정보들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수집 정리하는 정보센터 였는데, 이쪽도 현장 업무 한 번 뛰어보지 않아 현실감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시키는 일만 더럽게 많은 지독한 이상 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안 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뭐가 됐던 돈만 처먹은 총괄 관리부보단 나은 편이었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온갖 궂은 일 다 떠맡고 욕만 뒤지게 처먹으며 현장 업무 뛰어야 하는 건 서버 조사부의 몫이었다는 말이다. 즉, 잠뜰이 소속된 매번 인력난에 시달리는 이 부서는 문장만으로도 막중한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을 거의 혼자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사람들이 과거와 미래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자동으로 많은 귀찮은 것들이 딸려 온다, 그 말은 즉 일이 꼬일 확률 또한 높아진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연구소에 소속 된 관계자들 아주 극소수 뿐.
연구소에 접촉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정부에서 직접 선발했거나, 미리 시험한 적합성 테스트에서 선발된 극소수의 인원 중에서도 또 한 번 더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겨우 통과한 연구원들 몇. 공룡은 완전한 예외에 속해 있으니 제쳐두고, 잠뜰은 전자의 방법에 해당하는 극초기 인원 중 한 명이었고 덕개는 인원 충당을 위해 뒤늦게 들어온 후자의 방법에 속하는 연구원 이었다. 이런 뒷사정까지 더해져, 위험도만 높고 보상은 극히 적은 서버 조사부는 당연하게도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리곤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인데, 조사원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연구원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들이 몇 붙었으므로 그에 부합하는 사람도 얼마 없을 뿐더러. 다른 부서에 비해 대우나 취급 또한 최악에 가까웠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전부 부서를 이동하고자 안달이었다. 그러니 이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건 아직 순수한 정의감으로 가득 찬 덕개나, 의무감 져버리지 못한 잠뜰. 그리고, 괴짜 정공룡으로 오직 세 명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과거보다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처음 서버 조사부는 거의 잠뜰 단독으로만 움직였었으니까. 같이 선발됐던 동료들은 전부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며 떠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은 오직 잠뜰 하나 뿐이었다. 주변에서는 성적도 좋은 애가 대체 왜 그러냐며, 미련하다고 온갖 악담을 퍼부었지만 잠뜰은 꿋꿋하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잠뜰이 아니라면 이딴 개 같은 부서에 남아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잠뜰이 남아야만 할 이유는 충분했다. 과거와 미래를 돌아다니며 현재를 바로 잡는다, 이 연구소의 사명이자 유일한 목표. 잠뜰이 이곳에 입사한 것도 비슷한 결을 띄고 있었고, 무엇보다. 서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연구소 자체의 의미도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남아 있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 혹은 의무.
초반엔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일거리를 혼자 처리하려니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노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지금은 이렇게 곁에 함께하는 동료들도 생겨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뜰은 혼자서 움직이는 쪽을 더 선호했고 묘하게 짐 덩이가 더 늘어났다는 기분까지 들었지만. 어쨌거나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았다. 별것도 없는 자신을 동경한다며 찾아온 덕개나, 어찌 된 영문인지 저를 콕 집어서 같이 일하겠다고 한 공룡. 둘 다 조금 특이한 면이 있었으나 실력만큼은 확실했으니까. 금방 포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끈덕지게 이곳에 남아있는 열정만 해도 다른 연구원들의 몇천 배로 나았다. 이 연구소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만 모인 곳이 바로 이 서버 조사부였다.
그러고 보면, 정공룡은 첫 만남부터 그랬다. 갑작스레 연구소에 나타난, 알 수 없는 변이 조각 하나. 그게 바로 정공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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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인만큼 활동 뿐만 아니라 연구소의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으로 연구원들의 대부분은 정체를 지우듯 그림자처럼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정공룡만큼은 예외에 속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 어떤지도 잘 모르는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정공룡은 확실하게 이방인 취급이었다. 존재 숨기고 살아가는 연구원들 가볍게 비웃듯 매번 바깥으로 당당하게 드나드는 정공룡은, 첫 등장부터 이상했으니까.
그건 무척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몇 년 전, 연구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다름 아닌, 이 연구소와 연고 하나 없는 완벽한 외부인이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평소 연구소의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인 만큼, 건물조차 시간의 틈에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이방인은 일반인의 신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구를 찾아냈다. 그것도, 이상한 공룡탈을 쓴 채로. 신원불명, 출신 불명.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색, 그게 바로 정공룡이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정공룡은 곧바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추궁을 당하던, 기억이 지워진 채로 바깥으로 내쫓기던 했었을 것이다. 그 직후, 공룡의 입에서 박잠뜰의 이름이 나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덧붙여, 당당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 서버 조사부에 지원하러 왔댄다. 명성은 커녕 존재조차 지워졌을 게 분명한 그 서버 조사부를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퍽이나 당당한 정공룡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테스트를 실패한다면, 내쫓는 건 그다음이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행동이었다.
안그래도 인력난이었던 서버 조사부로서는 솔직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공룡의 말대로 조치는 테스트 다음이어도 늦지 않았다. 가벼운 검사 결과 정공룡은 신원불명인 것만 빼면 그다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언급한 정보들은 이미 일반인의 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결국, 속는 셈 치고 시행했던 입사 테스트에서 정공룡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냄으로써 이 연구소 내 대부분의 인간들보다 몇 배로 뛰어남을 입증해 냈다. 그 뒤로 이루어진 조사부 적합 테스트에서도 완벽한 적합 판정. 그쯤에서 그를 미심쩍게 보았던 시선들이 돌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다른 부서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냈을 텐데도 정공룡은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서버 조사부에서 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뛰어난 실력만으로 그의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증명으로 인해 그의 대한 몇 가지 의심들은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구태여 인재를 놓칠 이유가 없던 고위급 간부들은 정작 떠맡아야 하는 잠뜰의 의견 따위는 묻지도 않고 그 길로 정공룡을 서버 조사부로 편입해 넣었다. 바야흐로, 평화롭기만 하던 연구소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순간이었다. 처음 입사 할 때 보여줬던 이상행동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단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연구소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공룡은 기존의 규칙 따윈 자신을 구속 할 수 없다는 듯, 암묵적으로 연구소에만 머물렀던 다른 연구원들과 다르게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 반면에 또 일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덕분에, 위에서는 그를 제지 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것은 정해져 있던 원칙을 위반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신경에 조금 거슬리는 일이었을 뿐이니까. 그뿐이었을까, 매번 낭만 타령하며 헛소리에 가까운 말들만 늘어놓던 정공룡은 자꾸만 남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일들을 걸고넘어지곤 했다. 총괄 관리부의 무쓸모 함에 대해서라던가, 서버 조사부의 처사에 대한 불합리함에 대한 것들. 돈 많은 녀석들이 잘 먹고 잘사는 건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고 이곳에서도 그건 별다를 바 없었기에 정공룡의 의견은 조용히 묵살 당했으나 그걸 입 밖으로 꺼낸 것만으로도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이 달갑지 않게 변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잠뜰로서는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저렇게까지 구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증은 당연히 있었지만. 딱 그 뿐, 그 이상으로 관심을 두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고 괜히 저런 사람과 엮여 봤자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던 탓도 있었다. 그 당시 잠뜰은 이미 지친 상태였고, 커다란 변화의 바람에 휩쓸리지도 그렇다고 맞서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저 멀리에서 그로 인해 일어날 변화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실제 정공룡의 실력만큼은 보장 되어 있었으니 다른 건, 솔직히 어찌 되든 크게 상관 없었다.
덕개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인력난이었던 서버 조사부는 함께 팀으로 움직이기보단 개개인으로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이유는 그걸로 끝. 그러니, 공룡이 들어왔다고 해도 잠뜰이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전보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제 옆자리에 다른 책상이 하나 더 생긴 정도. 딱 그 정도의 변화. 그렇다 해도 여전히 정신없이 바빴던 것은 사실이라, 솔직히 두 사람은 제대로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 흔한 후배 교육 하나 없이도 정공룡은 이미 뛰어난 성과를 내보이고 있었고 덕분에 잠뜰은 그와 엮일 일은 딱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초반 며칠간은 두 사람은 접점 하나 없이 충실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해 냈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 잠뜰 또한 꽤나 만족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공룡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공룡은 계속해서 잠뜰의 곁을 알짱거리며 어지간히 귀찮게도 굴었었다. 어쩌다 본부에서 마주칠 때마다 특유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쓸데없는 말들을 잔뜩 걸어오곤 했는데, 대부분 쓰잘머리 없는 잡담이나 시시해 빠진 농담으로 의미 모를 말들 뿐이었다. 그러니, 잠뜰이 공룡의 대해 처음 느꼈던 감정은 미묘한 불쾌함과 거부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시감까지.
짜증나고 속 모를 녀석. 공룡에게 가지고 있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던 건 정확히 언제부터였더라.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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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두 눈을 뜨자마자 시야 가득 눈 찌푸릴 정도로 환한 빛이 들어온다. 여전히 새하얀 천장과 몸에 닿는 푹신한 침대의 감촉. 순식간에 이곳이 구석에 마련된 휴식 공간이라는 거 깨달은 잠뜰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잠든 거지, 시간은. 그보다, 정공룡 그 자식은 또 어디에 간 거지. 빠른 속도로 주변 훑어본 잠뜰이 급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순간적으로 균형 잃고 비틀 거리면-
" 뭐야, 깼어? "
어느새 문 열고 나타난 공룡이 조금 놀란 듯 잠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잠뜰이 무엇 때문에 이리 다급했는지 공룡이 몰랐을 리가 없다, 빤히 놀리듯 키득 웃음 흘린 공룡이 자연스레 잠뜰에게 따듯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건넸다. 이 자식, 처음부터 깨어난 걸 알고 찾아왔구만. 뻔뻔스럽게 모른 척을, 인상 팍 찌푸린 잠뜰이 공룡에게로 매서운 시선 쏘아 붙여도 여전히 느긋한 채의 공룡은 가볍게 어깨나 으쓱거렸다. 어때, 잠은 좀 푹 잤고? 탈 너머로 보이는 공룡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그 꼴 발견한 잠뜰이 억지웃음 짓듯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래, 아주 잘 잤고 말고...
" 지금 당장 널 쥐어팰 체력까지 회복 된 것 같은데, "
보여줄까? 잠뜰이 꾹 쥔 오른손 주먹 들어 올리면 공룡에게서 으하핫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말하는 거 보니 기운 차리긴 했나 보네. 그 말대로였다, 직전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실제로 잠 좀 자고 나니 며칠 동안 혹사 당했던 말이 드디어 원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이 상태라면 진짜로 공룡을 몇 대 쯤 쥐어팰 수 있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삑- 삑- 여전히 공룡의 손목에서 들리는 기계음의 소리가 선명했다. 야,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 순식간에 공간의 분위기가 바뀐다. 표정 진지하게 변한 잠뜰이 낮은 목소리 흘리면, 공룡의 시선이 자연스레 잠뜰 쪽으로 향한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 가볍기 그지없다. 속셈은 무슨, 순수한 호의를 그렇게 보면 곤란한데? 또 한 번 작게 웃음소리 흘린 공룡이 흘끗 시선 돌려 제 시계나 확인했다. 음, 대충 5시간 쯤 남았나. 됐고-
" 나갈 준비나 해. "
아직 내기는 안 끝난 거 알지? 제 오른손 들어 올린 공룡이 보란 듯이 잠뜰의 눈앞으로 시계를 들이밀었다. 오전 11시 30분 쯤을 가리키고 있는 시간. 어? 순간적으로 당황 섞인 탄성이 튀어나온다. 동그래진 눈이 크게 떠지는 건 덤이었다. 나 12시간이나 잤어? 내가 한창 학생 때도 이런 적은 없는데... 황당함 잔뜩 섞인 잠뜰의 중얼거림에도 가볍게 어깨나 으쓱인 공룡이 느긋한 투로 제 할 말이나 이어갔다. 으응, 그런 사소한 건 넘기고.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그 상태론 연구원이라는 걸 티 내는 꼴 밖에 안 되니까. 난 먼저 간다? 정확하게 제 할 말만 남긴 공룡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련 없이 뒤돌아 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너 설마... 그제야 상황 파악한 잠뜰의 표정이 이번엔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잠뜰 쪽으로 몸 반쯤 돌렸던 공룡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경쾌하다.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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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드럽게도 더웠다. 금방이라도 살이 다 타버릴 듯 찌는듯한 더위에 잠뜰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분명, 아직 6월 밖에 안 됐는데도 초여름의 날씨 치곤 지나치게 더웠다. 버스 정류장의 투명한 유리막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막는 것에 단 하나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낡아빠져서 군데군데 가시 튀어나온 나무 벤치는 지친 다리의 휴식은 커녕 불쾌감을 느끼는 것에 더 큰 기여를 하고 있었고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마저 뜨거운 열을 잔뜩 머금고 있어, 현재 잠뜰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물론, 현재 잠뜰의 불쾌감은 10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공룡의 탓이 가장 컸다. 지가 나오라 했으면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슬슬 머리끝까지 오르는 짜증에 안 그래도 험악하게 구겨졌던 인상이 더 험악해질 무렵, 익숙하고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주인 곧바로 알아차린 잠뜰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 하다 이제 오냐? 아, 미안미안~
" 뭣 좀 사 오느라. "
공룡이 자연스럽게 차가운 캔 음료를 잠뜰의 볼 쪽으로 가져다 붙였다. 갑작스레 닿는 생경한 감촉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순순히 줄 수는 없는 거냐? 에이, 그건 낭만이 없지! 또 그놈의 낭만 타령이다. 잠뜰이 여전히 불퉁한 시선 거두지 않아도, 공룡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깨나 으쓱였다. 일단 자리부터 옮길까? 거기, 보기만 해도 더워 보여.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어투, 잠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 자식, 일부러 기다리게 한 건가? 잠뜰이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제 아랫입술을 강하게 짓눌렀다. 참자, 여기서 화내면 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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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잠뜰을 이끌고 온 것은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오후 1시 쯤에 다다른 시간대의 공원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아이들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내리쬐는 태양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이 부드러운 바람까지 선사해 주고 있었다. 땅에 기어 다니는 개미들, 조금 이르게 잠에서 깨어나 울고 있는 매미 한 마리.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매일같이 멸망 틀어막느라 정신 없는 자신과 다르게 세상은 이토록 평화롭기만 했다. 달칵- 경쾌한 알루미늄의 소리가 들렸다. 잠뜰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의 근원지로 돌아간다. 어느새 캔 음료 오픈한 공룡이 탈 아래로 꿀꺽꿀꺽 음료수를 잘도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이 평화로운 풍경에 완벽하게 녹아든 공룡과, 여전히 혼자서 이물질 마냥 이질적이게 존재하고 있는 잠뜰. 쟤는, 걱정도 안 되는 건가. 내기의 유효시간, 즉 본부에 경고 알림이 가기까지 이제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공룡은 조금의 초조함이나 불안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애진즉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평소보다 몇 배로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여튼, 이상한 자식. 평소였다면 당장이라도 멱살 붙잡고 추궁이라도 했을 텐데,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굳이 깨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쩐지,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일단은 그냥 스쳐 가게 두기로 했다.
잠뜰이 공룡을 따라 손에 쥐어졌던 캔의 뚜껑을 가볍게 땄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갇혀있던 탄산이 공기 중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뜨거운 여름의 날씨 탓에 어느새 알루미늄 캔 겉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손바닥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시원한 액체가 부드럽게 목뒤로 넘어간다.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매미의 울음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 공원의 풍경은 지독하리만치 평화롭기만 하다. 묘하게 현실감각이 없었다. 공룡이 하는 행동들의 대부분은 의미가 없어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전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지금도 제 옆에서 생각 따윈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룡은 수많은 생각의 흐름을 거쳐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게 분명했다. 실내의 빵빵한 냉방된 공기 대신 숨이 막힐 만큼 덥고 텁텁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싸오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저절로 땀이 흐른다. 불쾌하기만 한 여름의 풍경, 대체 무얼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이곳저곳 굴러가기 시작한다. 묘하게 가라앉은 공룡과, 여전한 삑- 삑- 거리는 기계음의 소리. 이질감이 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평화로운 풍경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마냥 당연스레 존재하고 있었다. 애당초 멸망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 그래도, 나쁘진 않지? "
불쑥, 잠뜰의 상념 깨트리곤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웃음기 잔뜩 섞인 가볍기만 한 목소리. 잠뜰의 시선이 자연스레 공룡에게로 고정된다. 무슨 소리야? 잠뜰이 미간 조금 찌푸리면 공룡이 또 후후, 짧은 웃음소리나 흘렸다. 예전엔 상상도 못 했잖아. 이런 풍경, 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묘하게 뿌듯해 보인다. 누가 봐도 놀랐다는 대답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어쩐지 조금 신난 공룡이 잠뜰의 다음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나도 결과 보고 정도는 다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 묘하게 맥이 풀리는 느낌에 잠뜰이 픽, 짧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에엑, 공룡이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표출했다. 뭐야, 그 무미건조한 반응. 직접 보는 거랑은 또 느낌이 다르잖아?! 원래 이런 건 경험해 봐야 체감이 확! 되는거라구~ 확실히, 공룡의 말대로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롭긴 했다. 자료로만 전해 들었을 땐, 정말 이 정도로 평화롭고 일상적인 세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머리로는 인지해도 잘 받아들여지진 않았는데. 실제로 마주한 세상은, 정말 지나치도록 평화로웠다. 잠뜰의 시선이 시퍼런 하늘로 고정된다. 그 때도, 지금도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원래 이랬고, 부유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 잠뜰 뿐일 것이다. ...야,
" 너는 이게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해? "
공룡의 고개가 잠뜰에게로 돌아간다. 잠뜰은 막상 본인이 질문 던져 놓고도 애시당초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상대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공허한 회백색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시퍼런 하늘 뿐이었다. 잠뜰의 눈동자에 묘하게 하늘의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무언가의 사실을 전달하듯 잠뜰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또 담담했다. 세계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고, 까딱 잘못했다간 다시 몇 년 전의 그 살벌한 풍경으로 돌아가고 말겠지. 너도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봤잖아. 거기에 있던 데이터들도 전부 그곳에 살아 있었어. 우리가 지켜낸 현재의 기반에는 그들의 희생이 깔려 있지. 그들을 없앤 건, 이 두 손이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을 내뱉듯 물 흐르듯 터져 나오는 말을 공룡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듣기만 했다. 잠뜰 또한 공룡의 반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이번엔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피기나 했다. 여전히, 살아있다는 감각이 생생했다. 살아남은 것도 나고. 그러니, 지금 이 두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 분명 언제고 사라지고 말겠지. "
지금의 이 평화로운 풍경도, 잠깐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허상.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잠뜰이었고 떠나는 것은 주변의 모든 것들. 어느새 주먹 꽉 쥔 잠뜰의 모습은 무언가 체념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혹은 불안에 떠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 가만 응시하던 공룡이 알루미늄 캔을 가볍게 몇 번인가 두드렸다. 흐음, 짧은 비음 흘린 공룡이 이번엔 가볍게 웃음소리나 흘렸다. 내가 보기엔, 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제야 잠뜰의 시선이 공룡에게로 돌아간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마냥 잔뜩 놀란 얼굴이 선명했다. ...무슨 소리야? 어라, 웃었다. 여전히 탈에 가려 표정 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잠뜰은 직감적으로 공룡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웃음기 잔뜩 섞인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을 내뱉었다. 이것 봐,
" 네가 기억하고 있잖아. "
척- 공룡이 손가락 하나 들어선 또렷하게 잠뜰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도 기억하고 있고. 곧이어 손가락 돌려 자신 가리킨 공룡이 짓궂게 웃음소리나 흘렸다. 금방 사라져버려도 괜찮아, 전부 사라져도 괜찮고. 공룡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 쪽으로 돌아간다, 잠뜰의 시선이 그것을 쫓는다. 우리가 남겨 온 흔적이 이 세계에 남아 있으니까. 속살거리듯 작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곤 잠뜰의 귀에 정확하게 내리 꽂혔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잠뜰의 시선이 무심결에 그곳으로 고정된다. 삶은 원래 변화하는 거야. 변하지 않는 건 죽은 것 밖에 없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에. 그리고 이 세계의 흔적에 선명하게 남아 있지. 그러니 의미 없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공룡의 목소리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잔잔한 배경음처럼 공기 중으로 옅게 흩어졌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 적어도 우리한텐. "
이런 얘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미 잔뜩 불안정해졌던 마음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뒀던 단어들이 불쑥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풍경에 시선 고정된 잠뜰이 홀린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연구원들에겐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무 의미가 없어. 우리는 그저 애매한 공간에 존재 할 뿐이니까. 그저 시공간의 틈에서 부유하고 있는 먼짓덩어리에 불과하지. 잔뜩 불길한 말들 내뱉으면서도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마치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어딘지 멍한 눈빛. 언젠가 사라지고 말 추억에 매몰되는 것 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지. 공룡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이 잠뜰을 응시하기만 했다. 여전히 그 속에 담긴 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초여름의 공기 잔뜩 담은 미지근한 공기가 부드럽게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다. 더미 데이터,
" 우리도 따지고 보면 더미 데이터의 일부일지도 몰라. "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무게도 없이. 그저 텅 빈 껍데기로서 이곳에 존재하지. 우리의 존재는 이미 이 세계 어디에도 새겨질 수 없어. 모두에게 잊혀졌고,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아. 잠뜰이 그제야 말 끝맺은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말을 빨리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크게 숨을 삼켜봤자 들어오는 것은 텁텁하고 뜨거운 여름 공기 뿐이다. 으음, 여전히 느긋한 공룡이 천천히 고개나 기울였다. 시선은 계속해서 잠뜰에게로 향한 채다. 하지만,
"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있잖아? "
그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데이터라고 생각하는데. 공룡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섞인 채였다. 이 정도 말했는데도 공룡은 또 그놈의 낭만주의 기질이 발휘된 건지 현실감 없는 이야기만 내뱉고 있었다. 그것이 묘하게 불쾌했던 잠뜰의 고개가 매섭게 돌아간다. 눈동자에는 어쩐지 묘한 원망까지 섞인 모양새였다. 이미 수많은 세계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본 우리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아. 의미도 없고,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고 말 거야. 근데도, 지금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잔뜩 날카로운 목소리에 잠뜰이 쏘아붙이면 공룡은 또 조용해졌다. 분노의 방향이 잘못 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 나 진짜 최악이네. 잠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삑- 삑- 거리는 살벌한 기계음 소리만이 정적을 대신 채운다. 곧이어 터지듯 작은 웃음소리가 제 귓가에 꽂힌다. 돌아오는 대답은 잔뜩 날 선 분노나 실망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한결같이 가벼운 장난스런 웃음소리.
" 엄청 네거티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
공룡이 작게 키득거리며 잠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기나 했다. 인상 좀 펴~ 그러다 나중에 주름 자글자글한 할머니 된다. 공룡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미래의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에 황당함 가득한 표정 띄운 잠뜰이 헛숨을 내뱉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여전히 웃음소리나 흘리던 공룡이 느릿하게 잠뜰과 시선을 맞춰왔다. 자연스레 멈춘 웃음소리, 어디선가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그렇다고 해도,
" 우리가 여기에 있던 건 계속 흔적으로 남아. "
잠뜰 너도, 덕개도 살아있는 걸. 내 기억 속에 여전히 건재해. 잠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끝까지 한결같다, 그런 거 전부 의미 없을 텐데도.
" 우리 셋 다 한 번에 사그라지면 어쩌려고. "
또 한 번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도 공룡은 여전히 잔잔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고개나 까딱거린다. 공룡의 시선이 천천히 평화로운 풍경으로 돌아간다. 그 새까만 눈 가득 여름의 파란이 담긴다. 그래도,
" 누군가는 기억해 주겠지. "
공룡은 무언가 확실한 근거라도 있는 사람마냥 확신의 가득 차 보였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잠뜰이 무심결에 되물으면 공룡의 시선이 또 한 번 잠뜰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지켜낸 세계가 있으니까.
" 우리는 현재를 지키는 사람들이잖아, "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이 나무의 푸르름도 하늘에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도 전부 우리가 지켜낸 거고, 우리의 흔적이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현재 자체가, 우리 삶의 증명이란 소리지. 잠뜰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현실과 영 동 떨어진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를 우리가 지켜냈단들,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애당초 이 평화로움의 뒤편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로 움직이고 있는데 기억해주길 바라는 쪽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공룡을 응시한다. 공중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그거 알아?
" 아무리 혼자서 낭만 타령해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제각각의 인생보다 더 낭만적인 건 없어. "
공룡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마치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탈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반짝거리는 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두 손으로, 그걸 지켜낼 수 있다면 만족해. 공룡이 주먹 꽉 쥔 손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잠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너도 마찬가지잖아? "
그러니까, 매번 개 같다고 욕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거고. 공룡이 장난스레 눈웃음이나 짓는다. 그 다정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거야. 잠뜰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흐르는 정적을 초여름의 소리만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공룡이 한 번 더 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거 봐, 자연스레 들어 올린 공룡의 오른쪽 손목시계는 어느새 잠잠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뜰은 그제서야 제 속에서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던 미묘한 불안감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별, 금방이라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고독, 외로움. 그런 사소한 것들. 그렇기에, 잠뜰은 의도적으로 혼자가 되었다. 그편이 훨씬 더 편했다. 애써 드는 불안한 생각들은 휘몰아치는 일 틈에서 어느 정도 묻어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제 곁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있었다. 저를 기억하고, 제가 기억 할 타인. 그러고 보면 공룡은 예전부터 그랬다. 잠뜰이 혼란스러워 할 때면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 건네지는 캔 음료가 있었다. 대체 뭐냐고 쏘아붙여도 공룡은 그것이 낭만이라며 가볍게 웃어 넘겼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누군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공룡은 한결같이 가벼운 웃음소리나 흘려댔다. 그것만으로도 묘하게 안심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공룡의 대한 인상이 바뀌었던 것도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분명, 변화의 폭풍우에 휩쓸리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어느새 그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었다. 그래도, 그것이 꼭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야,
"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매번 쓰는 그 이상한 탈은 도대체 뭐고. 금세 게슴츠레 눈 뜬 잠뜰이 공룡 노려보면 공룡은 또 가볍게 어깨나 으쓱였다. 글쎄, 맞춰봐. 너라면 알 수 있을지도. 장난 섞인 웃음소리가 목소리에 가득했다. 잠뜰이 턱에 손 괴더니 진지하게 고민이라도 하듯 또 한참 조용해 졌다. 묘하게 긴장감이 흐른다, 음......
" 천사? "
아니다, 악마. 잠뜰의 입에서 나온 건 영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공룡이 크게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푸핫, 으하하핫! 한참이나 이어지는 명백한 비웃음에 머쓱해진 잠뜰이 괜스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왜 웃어! 잠뜰의 분노에도 여전히 웃음 멈출 생각 않던 공룡은 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는지 웃느라 눈에 조금 고인 눈물까지 살짝 훔쳐댔다. 으흐, 흐흐흐. 잠뜰, 역시 넌 재밌어. 전에도 그러더니, 그렇게 안 보여선 은근히 그런 쪽으로 믿음이라도 있나 봐? 미리 말해두지만 천사나 악마 같은 건 아니야.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을 거고. 공룡의 단호한 대답에 잠뜰의 입이 대놓고 불만 표출하듯 비죽 튀어나온다. 너는 낭만주의자면서 왜 이런 데서만 묘하게 현실 챙기냐? 직접 보기까지 했으면서. 후후, 그건 단순한 데이터 잔해 일 뿐일 걸 알 텐데?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엔 천사든 악마든 신이든 아~무것도 없다구! 여전히 단호한 대답. 어쩐지 오기 생긴 잠뜰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린다. 왜, 시공간을 멋대로 넘어 다니는 건 이론적으로 설명도 못 하면서.
" 신은 안 돼? "
그제야 공룡의 웃음소리가 뚝, 하니 멈췄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듯 눈 둥그렇게 뜬 공룡이 몇 번인가 그것을 끔뻑거리더니 또 한 번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리, 나름 과학의 산물인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해도 돼? 잠뜰이 흥, 콧방귀 뀌며 어깨나 가볍게 으쓱 거렸다. 안 될 건 뭐 있냐? 공룡이 느릿하게 고개나 끄덕거렸다. 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 그래도 역시 없을 걸. "
...이 자식 끈질기네. 잠뜰이 가자미 눈 하고 쏘아보면 공룡이 또 작게 웃음소리나 흘린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이딴 개 같은 세상은 멸망에 빠졌을 거라고? 이번엔 잠뜰이 눈을 빠릿하게 끔뻑거린다. 뭐지, 묘하게 말투가...
" 멸망을 만든 것도 인간. 그걸 해결하는 것도 인간. "
그걸 다른 존재의 책임으로 돌리고 행동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맞이하는 거야.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네거티브한 말들에 잠뜰이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얘는, 가끔 꼭 이렇게 이상한 부분에서 어두워지더라. 이럴 땐 손쉬운 해결 방법이 있지. 가볍게 한 쪽 손 들어 올린 잠뜰이 공룡의 뒤통수나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원래의 분위기 되찾은 공룡이 억울한 듯 잠뜰을 쏘아본다.
" 넌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
가끔 보면, 쓸데없는 생각 진짜 많이 해.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존재가 어쩌구 하던 사람이, 잔뜩 심통난 공룡이 투덜거리면 잠뜰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귀나 틀어막았다. 아~ 몰라 몰라. 너한테 옮은 거겠지. 공룡이 뭐라고 계속 꿍얼거렸으나, 꿋꿋하게 무시한 잠뜰이 시선이나 데굴데굴 굴렸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하지만, 아까처럼 불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결국 또 다시 시선의 종착지는, 저 이상한 공룡탈이다. 그래서,
" 너 진짜 정체는 뭐냐? "
그제야 꿍얼거림 그만둔 공룡이 잠뜰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잠뜰이 이 정도로 끈덕진 게 의외였는지, 잠깐인가 말이 없다. 궁금해? 공룡의 목소리가 전과 다르게 완전히 가라앉았다. 웃음기 하나 없이, 차분한 목소리 그에도 별다른 신경은 쓰지 않은 잠뜰이 가볍게 고개나 끄덕인 순간이었다. 공룡에게서 기묘한 노이즈가 일었다. 꼭, 더미 데이터에서 보이던 증상과 같은. 잠뜰의 눈가가 곧바로 찌푸려진다.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 공룡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건 망했군.
소름돋는 정적만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룡이 곤란한 듯 눈이나 데룩 굴렸다. 그와 동시에 삐빅, 정적 비틀곤 아까와는 다른 기계음 소리가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울렸다. 알림의 내용 확인한 공룡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나이스 타이밍. 덜컹, 과장스런 소리와 함께 잠뜰이 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이어 직전까지의 일 전부 잊은 듯 다급한 발걸음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점점 멀어지는 잠뜰의 뒷모습 바라보며, 공룡이 남몰래 작게 안도의 한숨이나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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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덕개! "
다급하게 문 벌컥 열고 들어가면, 아까와 같은 새하얀 방에 이번엔 잠든 듯 누워 있는 사람 대신 멀쩡하게 제 자리에 앉아 있는 인영이 마주한 잠뜰의 표정이 금세 밝아진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밀 빛 강아지 귀의 소유자, 덕개 또한 상대를 발견하자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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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재회도 잠시, 제각각의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잠뜰은 아직 차마 떨쳐내지 못 한 죄책감 탓에, 덕개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잠뜰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먼저 묻는 방법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러진 않았다. 그 행동에는 무언의 신뢰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고개 푹 숙이고 있던 잠뜰이 번쩍, 고개를 치켜올렸다. 결심의 의미였다. 그 올곧은 시선과 똑바로 마주한 덕개가 작게 웃음이나 흘렸다. 제가 잠든 사이에, 제 선배는 전보다 더 강인해진 모양이었다.
" ...미안해, "
나 때문에, 네가- 사과는 필요 없어, 선배. 잠뜰의 말 뚝 끊어먹은 덕개가 또 한 번 작게 웃음소리나 흘렸다. 애초에 선배가 사과를 왜 해? 그날 일은 단순한 사고였고, 나는 지금 여기 멀쩡히 있는데. 요즘 의료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전보다 몸이 10배로 쌩쌩해졌다고? 부러 장난스런 말 내뱉으며 키득거리는 덕개의 모습에 잠뜰은 또 한 번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는지 깨달았다. 당연스레 저를 향한 원망이나 분노 쏟아내도 전부 받아낼 거란 각오와는 다르게, 덕개는 한결같이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애초에,
" 내가 여기 있는 건 선배 때문인데. "
전부터 말했잖아? 선배가 아니었으면, 이런 연구소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래, 그랬지. 잠뜰의 얼굴이 그제야 안심한 듯 부드럽게 풀렸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 터트린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항상. 제 선배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주는 걸로 대답 대신 한 덕개가 빠르게 방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 공룡, 그 인간은 어디 갔어? "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었다. 분명, 자신을 구해낸 것은 공룡이었기에 감사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평소였다면 제가 일어나자마자 옆에 달라붙어서는 깐죽거렸을 인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현상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팀의 막내가 일어났는데. 조금 불퉁한 마음이 드는 건 덤이었다.
공룡의 이름이 언급 되자마자 잠뜰의 시선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하아아아...... 땅이 꺼질듯한 깊은 한숨. 덕개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그 인간 또 일을 저질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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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걔는 진짜 속을 모르겠어. "
잠뜰의 한탄 섞인 투정에 덕개가 동의하듯 고개나 끄덕거렸다. 음, 확실히 그런 편이지. 네가 겨우 일어났는데 보러 오지도 않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걱정은 커녕 느긋해 보이기나 하고. 하여튼, 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이코 아니야? 잠뜰이 반쯤 악담 퍼부으면 이번엔 덕개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음, 그건 아닐걸. 사실-
" 나, 그때 공룡이 탈 벗은 거 봤다? "
뭐? 진짜?? 덕개의 충격적인 발언에 잠뜰의 눈이 잔뜩 확장 됐다. 어쩌다가, 역시 얼굴 오크 설이 맞지? 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 에이... 묘하게 맥 빠진 잠뜰이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모습 잠깐 응시하던 덕개가 얼굴에 작은 웃음을 띄웠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다급했던 정공룡.
" 평소에 그렇게나 철통 사수하던 얼굴을 솔직히 그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무언가 분위기의 변화 감지한 잠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덕개의 표정이 묘하게 부드러웠다. 그때, 공룡. 탈이 벗겨진 건 신경 쓸 겨를이 하나도 없어 보였어. 그만큼 다급하고 불안해 보이는 표정은 정말 처음 봤다니까? 큭큭, 작게 웃음소리 흘린 덕개가 어깨나 으쓱였다. 솔직히, 나도 선배처럼 그 인간이 정 따윈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 보면 또, 평소엔 그냥 강한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 싸웠으면 적당히 화해하고. "
둘 사이에 끼는 것도 엄~청 피곤하거든? 덕개가 괜스레 입 한 번 삐죽거리면, 잠뜰이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또 조용해졌다. ...야, 덕개야. 엉? 미안한데.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잠뜰이 덕개의 대답 듣기도 전에 자리 박차고 일어나더니 그대로 어딘가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 바라보며 덕개가 작게 한숨이나 내뱉었다. 정말이지, 양쪽 다 귀찮은 선배들이었다.
잠뜰이 떠나간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디를 봐도 온통 새하얗기만 하고, 언제봐도 소름끼치는 인테리어였다. 생명력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방. 덕개가 다시 폭신한 침대에 제 몸을 던지듯 누웠다.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제 선배들이라면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결해 낼 테니까. 근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기묘한 기시감은 도대체 뭘까... 어느새 미간 조금 찌푸린 덕개가 직전 공룡에게 왔던 메시지 창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짧둥한 내용. 축하한다는 한 마디. 분명 공룡은 덕개가 일어났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 하아...... 덕개에게서 또 한 번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인간,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다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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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새하얀 정사각형의 방. 출입구 따위는 없다. 보이는 것은 하얀색 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공룡이 느긋한 태도로 벽에 머리나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탈을 벗은 탓인지, 묘하게 얼굴에 닿는 공기가 어색했다. 고요하다, 한 없이 고요했다. 이대로라면 잠에 빠져버릴지도, 천천히 눈을 감고 있자면 갑작스레 불청객의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잔뜩 화난 듯, 거친 발걸음. 그 소리의 주인 알아챈 공룡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위로 올라간다. 벌써 알아차렸나 보네. 직후, 공룡이 갇혀있던 공간의 문이 거친 소음을 내며 열린다.
" 여어, 잠뜰. "
생각보다 빨리 왔네? 공룡이 여상한 낯으로 웃으며 인사 건네도 잠뜰의 험악하게 구겨진 미간은 도저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직후, 아무 대답 없이 공룡의 코앞까지 다가온 잠뜰이 거세게 멱살을 틀어잡았다. 너, 처음부터 알고...! 잠뜰이 매섭게 쏘아붙여도 공룡은 가벼운 웃음소리나 흘려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잠뜰이 아무 말도 없이 공룡만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 감옥에 갇힐 거 알고 있었지? "
나랑 네 데이터를 바꾼 순간부터. 공룡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나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나는 윗분들한테 미움받고 있으니까? 그 대답에 잠뜰의 표정이 곧바로 찌푸려진다. 너...! 미리 얘기하는데- 잠뜰이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공룡의 단호한 목소리가 문장을 끊어먹었다. 이건 네 탓이 아니야.
" 애초부터 벌어질 일이었어. "
괜한 동정심이라면 그만둬, 동정심이라면 더더욱 그만두고. 웃음기 완전히 사라진 공룡의 무감한 낯이 잠뜰에게로 향한다. 탈을 벗은 얼굴 속 공룡은, 웃음기는 커녕 꼭 죽은 사람마냥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잠뜰의 표정이 더더욱 험악해진다. 분명,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고 있는데도 공룡은 눈앞에 잠뜰이 아닌 다른 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도, 전부 들었을 텐데?
" 나는 더미 데이터의 일부. "
그러니, 사라지는 것이 당연해. 내 정체가 뭐냐고 물었었지? 축하해, 이젠 궁금증이 해소 됐겠네? 금세 꾸며낸 듯 밝은 미소 그려낸 공룡이 작게 박수까지 몇 번 쳐댔다. 여전히 험악한 표정 풀지 않은 잠뜰이 그 꼴 가만 쳐다나 봤다. 너, 내가 그딴 말로 납득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분노 섞인 잠뜰의 목소리에 공룡이 작게 한숨이나 내뱉었다. 애초부터, 나는 이단 분자였잖아.
" 정해진 결말이었어. "
이 현재에 나는 어울리지 않아, 제멋대로 침투한 바이러스 같은 존재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굴지 마. 수도 없이 해왔잖아? 더미 데이터를 소멸 시키는 일은. 나도 그중 일부일 뿐이야. 이번엔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그저 모른 척 저 윗분들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리다 보면 나는 사라지겠지. 그럼, 그걸로 끝이야. 어려울 거 없잖아? 묘하게 차가운 공룡의 태도에도 잠뜰은 한결같이 공룡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상황의 대한 당황은 아니었다, 공룡의 말에 대한 불만도 아니었고. 그저,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묘한 기시감은...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공룡의 새까만 눈동자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저 공허한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딘지, 무얼 보고 있는 건지. 머릿속의 온갖 혼잡한 생각들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문득 들어차는 작은 기억의 파편. 박잠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정공룡,
"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
잠뜰의 질문에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공룡은 마치 의외의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어번 정도 꿈뻑거리더니, 곧이어 속을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띄워냈다. 음, 글쎄.
" 그건 이제부터 네가 알아내야지. "
그 말을 끝으로 암전, 잠뜰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삑- 삑- 소름끼치는 기계음이 다시금 들려온다. 그럼, 좋은 꿈 꿔. 마지막으로 귓가에 꽂히는 얄미운 목소리와 함께 잠뜰의 정신이 점점 깊은 수마에 빠져 들었다.


